스물둘, 존재의 아름다운 신비에 이름을 붙인다면
스물둘, 존재의 아름다운 신비에 이름을 붙인다면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3.09.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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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孔德之容(공덕지용)은 惟道是從(유도시종)이니 道之爲物(도지위물)은 惟恍惟惚(유황유홀)이니 惚兮恍兮(홀혜황혜)여 其中有物이요 窈兮冥兮(요혜명혜)여 其中有精(기중유정)이라 其精甚眞(기정심진)하니 其中有信이라.

自古及今(자고급금)에 其名不去(기명불거)하니 以閱衆甫(이열중보)라.

吾何以知(오하이지) 衆甫地狀哉(중보지상재)인가, 以此(이차)니라.

 

- 제대로 된 덕의 모습은 오로지 제 길을 따르니, 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얼른 말로는 할 수 없으나 그 놀라운 신비 안에 존재의 실상이 있고, 그윽하고 아득한 자리에 있는 존재의 본질이 있다. 존재의 본질은 늘 참되니 그것이야말로 미더움 그 자체이다.

예로부터 이제에 이르도록 그 실상이 사라진 일이 없으니 이로써 큰 틀을 헤아릴 수 있다. 내가 어찌 존재의 큰 틀을 알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다.

 

孔德(공덕)은 직역하면 ‘큰 덕’이라는 말입니다. 이 또한 德(덕)을 강조한 것이지 굳이 큰 덕과 작은 덕이 따로 있을 수 없는데, 아무튼 그런 덕의 모습은 언제나 道(도)를 벗어나지 않는데, 실체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道(도)라는 것은 말로 드러낸다면 그저 아름다운 신비, 다시 말하면 恍惚(황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존재의 아름다운 신비 안에 실체가 있고, 그윽하고 아득한 거기에 실체의 근원이 도사라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변함이 없는 미더움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어긋나 본 일이 없는데, 거기에 존재의 큰 틀이 있고, 거기서 미루어 모든 것을 읽어간다는 것이 이 장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홀하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하고 듣습니다. 옛늙은이는 이 황홀함을 강조하여 惟恍惟 惚(유황유홀), 惚兮恍兮(홀혜황혜)라고 하는데, 여기서 兮(혜)는 감탄사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튼 이 ‘황홀’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존재의 아름다운 신비’라고 이해를 하며 이 글을 읽곤 합니다.

모든 존재는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진실입니다. 어떤 존재, 또는 남을 아름답게 읽어낼 수 없는 눈은 이미 병든 눈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못 보고 한 단면만을 보는 비뚤어지거나 비틀린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보이는 것에게도 불행이지만, 보는 이 자신 또한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불구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쯤이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라는 것도 밝혀 둘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 순간이 또한 그렇게 아름다운 신비라는 것,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헤아릴 수만 있다면 이미 차원이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신비로 가득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 아름다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며, 그렇게 사는 삶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 또한 황홀이 아니겠느냐는 말로 오늘 이야기를 여기서 접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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