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죄악
기분 좋은 죄악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3.06.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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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술은 취기만 오르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까지 활짝 열게 한다. 술잔을 기울일 땐 그동안 가려졌던 마음의 가리개도 훌훌 벗게 되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래 술은 마음의 솔직을 운반하는 물질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술이 이런 이로움만 안겨주는 게 아니다. 때론 악마의 피가 되기도 하고 만취(滿醉)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여태껏 술로 인해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주량의 대소를 떠나 입에 술잔을 대었다하면 전신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지는 신체 반응 탓이다. 아마도 술 못 마시는 유전적 체질인 듯 싶다.

남녀를 불문코, 술 못 마신다는 말이 미덕이 못 되는 세상이 되었다. 술 문화는 사회적 구조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남녀 귀천의 차별이 없어지고, 남녀 직업의 구분이 없어진지 오래다. 술 좌석에서도 남녀가 자연스레 서로 술잔을 권하는 술 문화가 보편화된 이즈막이다.

그럼에도 술 한잔 비우지 못하는 스스로가 현대인답지 못하다는 자책으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

술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고, 사회를 부드럽게 하는 일정부분의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남성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여겨진다.

남녀 합석에서 우위적 존재를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다. 술이란 무기가 있기 때문이리라.

여자로 태어남이 때론 후회스러운 것도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술의 독점권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술이란 게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경구가 말하듯 술이 인간을 망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본다.

술중독자, 우울증, 폐인, 폐륜, 살인,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이 말들은 한통속으로 술이라는 범인이 뒤에서 조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사회문제로 불거지는 주폭 또한 술이 원인 아니던가.

갱년기의 우울증을 못 참아 집안에서 홀로 홀짝홀짝 마신 술이 원인이 되어 패가망신하는 이웃을 본 적 있다.

술에 취하여 이성을 잃으면 살림도 가족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지인도 있다. 그녀는 결국 황혼의 나이에 이혼이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불쌍한 여인이다.

그녀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다. ‘한 잔의 추억’이란 노래다.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며는/어데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며는/반쯤 찬 술잔위에 어리는 얼굴/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 잔의 술/마시자, 마셔버리자.’

일 핑계로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을 대신하여 술 한잔에 외로움을 위로받던 그녀였다.

나 또한 이 노래를 불러보곤 한다. 늘 우수에 젖었던 그녀의 어두웠던 모습이 눈앞에 어린다. 기분 좋은 죄악인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탓에 그것에 굴복한 그녀의 나약한 삶에 연민마저 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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