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얼굴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들 얼굴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0.22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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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오창근<EMS학원중등원장>
좁은 아파트에서 이유 없는 징역살이를 하시는 아버지를 깨끗이 씻겨 청주 동물원 산책한다. 짙은 녹음에 가려 무더운 한낮을 살았던 빨강. 노랑의 색소가 삐져나와 곱디고운 채색을 한다. 손닿으면 묻어날 것 같은 고운 빛깔이 눈부시다.

86년 세월의 무게가 지팡이를 누른다. 한걸음 옮기시며 숨을 고른다. 어머니 떠난 빈자리가 가을 낙엽 뒹구는 황량함으로 다가선다. 왜소해진 몸집에 받는 햇살도 적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 맑은 구름 그늘을 지운다. 노란 옷에 앙증맞은 명찰을 단 아이들이 짝꿍 손을 잡고 올라온다.

고놈들 얼굴은 언제나 따사로운 봄이다. 자맥질하는 물범을 보며 소리를 지른다. 마음 급한 어머니들 두 손으로 높이 안아 들고 좀 더 자세히 보라고 성화다. 동물 이름을 몇 번씩 되물으며 애들 머리에 각인시키려 애쓴다. 병아리 무리 속에 내 아버지가 있다. 시간이 혼재되어 있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1학년 아들놈 담임이다. 열이 나고 어지러워한다고 병원을 가란다.

컨테이너 상자에 마스크 쓰고 앉아 부모 맘 녹이는 어린 생명이 줄을 잇는다. '신종플루' 의심이라는 진단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침대에 눕히고 물수건 이마에 대주고 돌아서니 문 앞에 아버지가 서 계신다. 전염의 염려가 있어 안방을 내주고 거실 출입을 막았다. 어린 손자 걱정에 동동거리는 아버지 맘이 눈에 보인다. 연로한 아버지와 어린 자식의 문지방 앞에 내가 서 있다.

살과 기가 빠져 푸르뎅뎅한 거죽만 앙상한 뼈를 덮고 있다. 아버지의 몸을 보며 고열로 신음하는 어린 자식의 얼굴을 만져 본다. 가진 것 모두를 자식에게 내주고 세월 앞에 여위어가는 아버지의 시간 앞에 난 다른 이의 아버지가 되어 심장 한쪽 내주어도 서운치 않을 외눈박이 사랑을 한다.

아버지의 몸에는 당신의 살을 깎아 자식의 몸이 되게 한 아픈 상처가 있다. 날카로운 산길 나무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온 지게 끈의 푸른 멍과 볍씨 낟알들이 밥이 되게 하신 뭉툭한 손마디에 굳은살로 맺힌 고단한 눈물이 있다. 그리고 자식들 앞길 살피는 노심초사에 이젠 침침해 시원함을 잃어버린 물기 어린 눈이 있다.

어린 자식의 몸을 어루만지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논둑길 팔랑거리며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새참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뛰어가는 내가 보인다. 피사리에 굳어진 허리를 펴 하늘을 보는 아버지의 뻐근한 통증이 내 몸에 되살아나 아픔이 된다. 달구지 사러 읍내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던 언덕길 양옆에 하늘 높이 솟은 미루나무가 보인다. 흙장난하던 손 바지에 털고 저 멀리 오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가슴 뛰던 내 어린 모습이 아들 얼굴에 어린다. 이제는 아스라이 사라져 흔적조차 희미해진 길이라 믿었는데 앓아누운 아들의 푸른 실핏줄 사이로 조금씩 드러난다.

아버지가 준 헌신의 삶이 지문처럼 박혀 내 삶을 이룬다. 옮을 수 있다는 상식과 대신 아파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얽힌다. 이부자리 깔고 옆에 누워 쌔근거리며 팔딱이는 숨소리와 문지방 앞에 서성이는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죽 사 들고 와 현관문을 여니 아버지 황급히 아들 방 문지방을 넘어 나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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