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향기
가을의 향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1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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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 영 희 <수필가·충북교육과학연구원 총무과장>

광장의 곱게 물든 단풍잎 위에 가을이 머무는가 싶더니 벌써 헤어질 시간을 알리는 듯 퇴색된 낙엽들이 흩날리며 비움의 메시지를 전한다. "파티에 참석한 손님이 너무 일찍 가버리면 주인이 서운해 하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지루해 하니 적당한 때 일어서야 한다."고 철학자 세네카는 떠날 때를 말했다는데 단풍과의 이별이 지금인가 싶어 서운한 마음으로 한번씩 더 바라보게 된다.

떠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문을 여니 모과와 노란 소국이 배시시 웃는데 그 웃음에 향기가 배어나와 사무실이 온통 그윽한 향기로 가득하다.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쪽 문을 열어준다고 하더니 그것을 보여줌인가. 그 존재만으로 주위 모두를 즐겁게 하던 아이의 아기 때 모습이 노란 모과와 소국에 클로즈업되어 크게 다가온다.

어렸을 적 그 아이는 참외가 나무에 달렸다고 굳이 따 달래서 맛을 본 다음에야 인상을 쓰며 참외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확인했고, 나무에 달린 참외라고 해서 모과(木瓜)라고 쓴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난 후 외할아버지한테 배웠다.

그 아이가 벌써 군대를 다녀왔으니 옛날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어릴 적 시골집의 탐스러운 모과나무와 화단의 국화를 우리 사무실에 옮겨 놓은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든다.

그윽한 국화 향기와 새콤달콤한 모과향기가 합해져 아련한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그 시절 어머니는 "모과는 버리는 게 하나도 없다."며 모과로 술을 담그고 모과차를 끓여서 감기를 예방하게 했다. 국화차, 국화주를 담그는가 하면 국화를 말려서 문창호지 바를 때도 넣고 베갯속에 넣어 건강과 멋을 함께 챙기셨다. 그랬는데 인스턴트 커피에 길들여진 우리는 점점 그런 낭만과 멋을 잃어가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가게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 는 속담이 있을 만큼 모과는 못생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탁자 위의 모과는 진화를 했는지 하나같이 잘 생겨서 방문하는 분들의 관심을 끈다.

그 향기를 제공하기 위해 국화를 삽목해서 물 주고 햇볕 보여주며 정성을 다한 분이 모과나무에도 제때 약을 뿌려서 예쁜 참외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도록 했나 보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사무실마다 나누어 준 분에게 고맙고 이런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모과를 나누어 주었더니 가끔 향기 있는 문자를 보내서 행복감을 더해 준다.

"모과 향기가 10리까지 퍼져 나가 그대 생각나네." 등의 감미로운 메시지가 향기를 타고 문자에 묻어 나온다. 모과를 나누어 가지며 이런 따뜻함이 전해지니 '나누면 채워진다.' 는 나눔의 미학도 덤으로 얻는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모과가 몇 개 남지 않았는데 내일은 재래시장에 가서 더 사다가 방문하는 지인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우리원의 나무에는 쉬지 않고 모과가 계속 달리는 것처럼.

흐린 날이라 차림이라도 밝게 하자고 오늘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왔는데 방문한 지인이 노란 모과와 노란 국화에 노란 블라우스까지 센스가 탁월하다고 하니 향기가 나지 않는 블라우스가 갑자기 겉도는 듯 느껴진다.

오래된 술일수록 향기가 나고 귀히 여겨지듯, 사람답게 살아서 모과나 국화 같은 가을의 향기가 노란 블라우스에서도 발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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