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본 것
봄날에 본 것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4.04.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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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한겨울 봄을 기다릴 때는 봄은 퍽이나 더디게 온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일단 봄이 오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산과 들의 모습이 달라질 정도로 분주한 모습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떠나가 버리고 만다. 그래서 봄을 아끼는 사람들은 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고 싶어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조식(曺植)은 봄날 하루가 해 낸 일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며 감회에 젖었다.


봄날에 본 것(春日卽事)

朱朱白白皆春事(주주백백개춘사) 여기저기 붉어지고 이곳 저곳 희어지는 게 모두 봄이 한 일인데
物色郊原得意新(물색교원득의신) 자연의 빛깔이 성 밖 들판에서 마음껏 새롭게 변한다네
自是東皇花有契(자시동황화유계) 저절로 봄의 왕과 꽃들은 만남을 이루는데
髥君於汝豈無恩(염군어여기무은) 소나무 너에게는 어찌하여 은혜가 없는가?

일 년 사 계절 중에 봄이 시각적으로 가장 변화가 심하다. 자고 나면 안 보이던 꽃이 피어 있고 나뭇잎이 돋아 있고, 옅던 빛이 진해지는 게 봄날이다. 시인이 보기에 여기저기 붉게 꽃들이 피는 것이나 이곳 저곳 하얗게 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봄날의 일대 사건들이다. 성 밖 들판에 있는 모든 나무나 풀들이 제 맘껏 새로운 빛을 띠게 되는 것도 봄날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일들을 저지른 주인공은 누구일까? 시인의 표현을 빌면 봄의 왕 곧 동황(東皇)이다. 봄의 왕은 모든 꽃과 나뭇잎 그리고 풀잎에 은정을 내리고 봄의 빛으로 새단장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 은정으로부터 비켜 나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염군(髥君) 즉 소나무이다. 시인이 보기에 소나무 빛깔은 봄이 돼도 별반 차이가 없다. 봄의 왕이 은정의 손길을 보내지 않아서 그렇다고 시인은 본 것이다. 이는 온갖 변화로 요란한 봄 세상에서 부화뇌동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의 성정을 칭찬한 것일 수도 있고 봄날의 변화무쌍함에서 소외된 소나무의 초라함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판단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봄날의 사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빛이 바뀐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을 맞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너무나 쉬운 변화 특히 며칠 지나면 떨어지고 마는 꽃의 모습은 허무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봄이 선사하는 화사함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요란한 봄 잔치에 약간은 초라해 보이는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소나무의 묵직함에 고개를 끄덕일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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