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짓는 마음
이름을 짓는 마음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4.05.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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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트럭이 나왔다. 올해 `청년창업농'에 선발되어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는 아들의 하얀색 1톤짜리 트럭, 포터다. 4년 전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농부가 되겠다며 다시 한국농수산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주위에서 우려의 말들이 많았다. 나도 힘들지 않을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지하고 응원해 주자고 결정했었다. 왜냐하면 요즘 농사는 옛날과 다르기도 하고, 먹거리가 점점 중요해지는 시절이다 보니 전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은 도전을 즐기는 성격이고, 성실함이라는 무기가 있으니까 뭘 해도 잘할 거라는 믿음이 컸던 것 같다.

진로를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줄 안다. 결정한 후에도 잘한 선택인지 어떤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한 마음이 왜 없었을까만, 그 부담감을 이기고 한 발 한 발 차분히 내딛는 모습이 그저 대견하기만 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나란히 가다가 벌어지고, 교차하는가 하면 합류했다가 다시 갈라지기도 하면서 끝없이 펼쳐진다. 또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중간에 끊기거나 틀어져 다른 길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 잇닿은 길 위 어디쯤에서 아들의 마음속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땐 다른 길로 접어들면 그뿐,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은 길만큼이나 무수히 많다는 것도 기억했으면 한다.

아들이 가족 단톡방에 트럭 사진과 함께 이름짓기 공모를 띄웠다. 상품은 앞으로 수확할 잘 익은 멜론 한 통이란다. 제일 먼저 작은딸이 제 성격대로 정직한 작명, `허포터'를 제안했다. 큰딸은 `허리포터'를 들고 나왔다. 아들이 어릴 때 마법 주문을 외고 다닐 정도로 해리포터를 좋아했던 게 생각난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나이 터울이 있어서 그런지 어려서부터도 두 딸은 동생을 무척 예뻐했다. 키울 때는 힘들었어도 이렇게 삼 남매가 서로 위해주며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인형이든 장난감이든 새로 산 물건에 항상 이름을 지어주게 했었다.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하다 보면 대상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저절로 생겨나고, 그렇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나면 훨씬 소중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단순한 호칭을 정하는 것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던 어느 시인의 시처럼.

한나절 궁리 끝에 괜찮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트럭의 `럭' 자를 따서 `허럭'이라고 하면 어떨까. 동음(同音)의 영어 단어 `luck(행운)'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까 뜻도 좋을 것 같다. 땅이란 원래 정직하게 일한 만큼 돌려주지만 여러 가지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를 망친 농부들도 많이 봐왔기에, 이제 처음 농사를 시작하는 아들에게는 분명 얼마간의 행운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15년째 함께 해온 우리 집 모란앵무는 `허새', 7년 된 반려묘는 `허밍', 모두 이름이 외자니까, 트럭의 이름도 돌림자처럼 한 글자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들은 과연 어떤 이름을 선택할까? 내 생각에는 큰딸의 `허리포터'가 가장 유력할 듯싶은데. 어쨌든, 트럭이 항상 아들이 가는 길마다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가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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