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의 한글사랑 그 흔적을 찾아서
제헌 국회의원 해관(海觀) 신현모(1894∼1975)는 독립운동가다. 자(字)가 '윤국'이므로 일부 문헌은 '신윤국'으로 기재한다.
옛 유명 요정 '대원각' 여주인 김영한(1916∼1999)의 일화에 등장하는 해관은 '신윤국'이다. 김영한은 1000억원대 땅과 건물을 길상사 회주 법정(75)에게 시주한 여성이다. 동시에 시인 백석(1912∼1995)의 영원한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녀 김영한은 기생이었다. 그러면서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이 소녀의 운명을 바꾼 이가 바로 해관이다. 해관은 그녀의 일본유학을 주선했다.
해관의 배려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김영한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관이 수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감옥으로 달려왔다. 일제가 면회를 불허하자 김영한은 다시 기생이 됐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해관 뿐 아니라 어쩌면 황진이급이 될 수도 있었던 한글 문재의 싹을 짓밟았다.
해관은 조선어학회 사건에 앞서 동우회(현 흥사단) 사건으로도 옥고를 치렀다. '투옥'하면 반골이 연상된다. '반골'은 무인기질을 풍긴다. 게다가 해관은 야당인 한국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문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는 12월 30일까지 계속하는 '한글학자의 겨레사랑-조선어학회사건과 조선말 큰사전' 전시회로 가면 해관의 한글사랑과 마주할 수 있다.
해관은 자술기 '필부불가탈지(匹夫不可奪志)'를 남겼다. 책에서 해관은 조선어학회 일에 몰두할 당시를 청상(淸爽), 즉 맑고 시원한 시절로 손꼽았다. "1935년 이래 조선어학회와 관계가 생겨 그 기관을 도우려 했다. 8·15광복 이후에 발간된 '(조선말) 큰사전' 6권의 후기에 기록된 이우식, 장현식, 김양수 등과 함께 사전 편찬을 위해 재정지원에 참가하고 1937년부터는 서울 출신 15명, 지방출신 15명 등 30명의 일원이 돼 3년간 회합에 출석해 우리말의 표준어 사정에 참여했다."
결국, 조선말 큰사전은 해관 등의 비용부담으로 빛을 볼 수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럼에도 해관(사진 앞줄 오른쪽 끝)은 이윤재 김윤경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한징 정인승 장지영 이중화 등을 "참으로 보배로운 학자들"이라고 추어올리며 "이 청빈한 가운데 민족의 생명인 우리말을 가꾸고 지키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진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내가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보람이었다"고 스스로를 낮춘다.
다만, "우리말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말 모음, 그리고 큰사전 편찬은 일제 하에서 우리민족이 이룩한 사업 중에서 알토란 같은 업적이 아닐까 한다"며 감격을 감추지 못할 뿐이다.
1942년 일본인 시각의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말 수호를 위해 가난과 싸우고 일제의 눈길을 살피면서 이어온 귀중한 학자들의 노력도 중단되고 말았다"며 비통해 한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의 참담함이 생생하다. "(서울)화동에 있던 어학회관이 수색돼 관계 연구자료와 큰사전 원고 등 일체의 연구업적이 압수되고 관계자 33명이 함경도 홍원경찰서로 묶여갔다. 13명이 기소돼 각각 6년에서 2년의 체형을 선고 받았으나 불복 공소 중에 8·15 광복을 맞이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 자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비화도 공개한다. "8·15광복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돼 오늘날 우리는 일제하 고난의 산물인 큰사전 6권을 갖게 됐다"는 안도다.
한글은세종대왕(1397∼1450)과 집현전 학자들이 발명했다. 한글은 해관을 비롯한 조선어학회원들이 사수했다. 엊그제는 561돌 한글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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