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머문 자리
생각이 머문 자리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3.10.10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여름내 철없던 시간이 가을 문턱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삼복더위가 한창일 때 꼿꼿하게 붉디붉은 꽃을 피워 올린 맨드라미와 그 옆에 다복하게 핀 봉선화꽃도 만발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데 꽃잎을 따는 내내 소녀처럼 설렌다.

매년 봉숭아물들이기를 하는 난 올해도 채반에 봉선화 꽃잎과 이파리를 꺾어 서늘한 곳에 신문지를 덮어 시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파리와 꽃잎이 구둑구둑 해질 무렵 절구에 백반과 약간의 소금을 넣어 곱게 찧었다. 발톱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곤 비닐로 발가락을 감싸 무명실로 찡찡 동여맸다. 잠버릇이 고약한 유년기엔 봉숭아물들이는 밤이면 비닐이 빠져나가 이불이며 배갯잎에 울긋불긋 봉숭아물이 손톱보다 더 진하게 물들곤 했었다. 그 기억 때문에 봉숭아 물들이는 날이면 혹여나 비닐이 벗겨질까 봐 양말을 신고 자면서도 자다 깨다 하며 물들이기에 정성을 들였다.

이튿날, 봉숭아물이 잘 들여진 붉은 발톱에 눈길을 주면서 첫눈 내릴 때까지 잘 버티길 주절주절거렸다. 선조는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동국세시기 기록에 의하면 첫사랑을 기다리는 때인 소만(小滿), 입하와 소만 무렵 손톱에 봉숭아물들이기가 있다. 또한 봉선화물의 붉은색이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믿음에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민간신앙의 의미가 있어 열심히 물들였다. 어쩌면 손톱을 아름답게 하려는 여인의 마음도 있지만 봉숭아물들이기는 첫사랑을 기리는 선남선녀들의 깊은 연정(戀情)을 물들이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을까.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도 기력을 잃고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寒露)가 수런거리며 다가온다. 이러구러 내 발톱에 반달이 떴다. 붉은 물이 톡 터질 것 같은 반달에 시선을 얹혀놓고 요동치는 마음을 다독였다. 지난해 봉숭아물이 발톱 끝자락에 머물자 달포 동안 깎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직장에서 간절히 소망하던 일이 이뤄졌다. 딱히 봉숭아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남아 있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발톱을 깎아야 하는데 반달이 뜬 발톱을 깎지 못하고 슬그머니 손톱깎이를 집어넣었다. 행여나 반달이 그믐달로 변할까 노심초사다. 계란 두 판을 향해 달음 치는 나이에 첫사랑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첫사랑이 이뤄지길 소망하는 것도 아니다. 딱히 깎지 말아야 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 부러질까 애지중지한다. 왠지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 것 같은 믿음, 그 생각이 이뤄지길 원해서다. 노력도 운도 따라오겠지만 자신의 신념과 진리는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느냐에 달렸다. 타인의 의해서 내가 바뀐다면 고통과 상처가 되지만, 내가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면 능력자가 되는 법. 그래서 첫사랑이 이뤄지기보다는 나의 염원이 이뤄지길 소망하면서 봉숭아물이 빠지기 전 첫눈을 기다리는 거다.

발톱에 화사하게 핀 반달이 얌전히 앉아있다. 하루를 쏟아부어도 모자란 시간이 서둘러 가을을 향해 달려간다. 생각이 머문 마음의 시계는 세월의 깊이를 파악하면서 날카롭고 진중한 눈길이 매섭게 쫓아간다. 사람들은 큰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내가 힘들다고 벗어나고 떠나고 싶은 그 자리에 누군가는 간절하게 앉고 싶어하는 자리일 수 있지 않은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허투루 보면 안 되는 것처럼.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갈바람이 인다. 반달이 뜬 발톱 위로 삽상한 갈바람이 훑고 지나간 자리엔 두둥실 환한 보름달이 얼비춘다. 염원을 품고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