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시멘트산업과 시멘트세
충북의 시멘트산업과 시멘트세
  • 엄경철 기자
  • 승인 2020.12.0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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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엄경철 선임기자
엄경철 선임기자

 

해방 직후 남한은 북한에 집중됐던 에너지, 원자재 등의 공급이 차단되면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표적인 원자재는 시멘트였다. 당시 한국에는 7개의 시멘트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중 남한에는 강원도 삼척 월산 시멘트공장이 유일했다. 그마저도 생산량은 해방 전의 절반 수준이었다.

해방 이후 극심한 경제난 해소가 최대과제였다. 특히 경제를 살리기 위한 기반인 국토건설과 에너지 확보를 위한 수력발전시설이 급했다. 이들 국책사업에 필수적인 것이 시멘트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시멘트 공급이 중단된 상황에서 남한의 생산시설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정부는 시멘트 생산시설 확충에 나섰고 유력후보지로 석회암지대인 단양 매포지역이 급부상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정부는 1949년 국비가 투입되는 시멘트공장을 단양군 매포에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강원도 삼척 월산 시멘트공장에 이어 남한에서 두 번째 공장이었다. 매포 시멘트공장의 최종 생산목표는 30만톤이었다. 1960년대에는 제천에 대규모 시멘트 공장이 건설됐다. 연생산량 40만톤 규모였다. 국내자본과 차관이 투입된 제천 시멘트공장은 착공 1년8개월 만인 1966년 12월에 준공됐다.

이후 단양을 중심으로 충북 북부지역은 크고 작은 시멘트 공장이 들어섰다. 충북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화된 국토건설과 경제재건에 필수산업이었던 시멘트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충북의 시멘트산업은 국가경제발전은 물론 지역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단양의 경우 시멘트공장 가동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긍정적 효과를 누렸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도 적잖았다. 환경파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었다.

시멘트 광산이 밀집된 단양은 물난리지역의 대명사였다. 산악지역의 자연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인위적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시멘트를 생산하면서 산림훼손 등 환경파괴가 지속됐다. 환경파괴는 재난재해로 이어졌다. 장마철이면 물난리를 겪었던 단양은 시멘트공장이 밀집된 매포를 중심으로 홍수지역의 오명을 오랫동안 벗지 못했다.

또 주민들은 비산먼지와 교통사고 등 일상에서 안전사고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았다. 비산먼지 차단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이 지역의 주택 지붕, 장독대에는 시멘트 가루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시멘트공장의 대형차량에 의한 난폭, 과속운행은 늘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이처럼 시멘트산업이 국가와 지역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에는 지역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파괴된 자연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어지고 있지만 대책 없이 세월이 흘렸다.

우리는 과거 석탄산업의 사양으로 탄광지역이 황폐화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로 탄광이 없어진 자리에 카지노 등 위락시설이 대신했지만 황폐화된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멘트 신설 법안을 놓고 시멘트 피해지역 국회의원들은 엉뚱한 기금조성 타령을 하고 있다.

시멘트 피해지역은 시멘트세 신설뿐 아니라 시멘트산업 이후 어떤 먹거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석탄산업을 대체하지 못했던 지역들이 받았던 고통을 시멘트산업 지역에는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기업은 시멘트세 뿐 아니라 후대에게 물려줄 피해지역의 먹거리 창출까지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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