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등불이 돼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를 4대 성인이라고 한다. 이들 중 왼 종일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에게 `무지(無知)의 지(知)'를 설하고, 저녁 한 끼를 대접받는 청빈한 삶을 살다가,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신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무지의 지'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진실한 앎을 담보해 내는 근원이라는 의미다. 잘못 알고 있으면, 오히려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따라서 바르게 알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낫다. 아니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즉 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제대로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부지(知不知) 상의(上矣)', 즉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최상이라는 노자의 가르침도 `무지의 지'와 별다르지 않다. 공자의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시지야(是知也)', 즉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질문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사과 향이 코를 찌르는 과수원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수원이 시작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며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최고의 사과를 하나씩 따 와라. 한 번 지나치면 다시 뒤로 갈 수 없으며 선택은 단 한 번뿐이다” 제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과수원 이곳저곳의 사과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가장 크고 잘 읽은 사과를 따서, 과수원 끝의 소크라테스 앞에 도착했지만, 모두가 실망하는 얼굴빛을 띠었다.
그들 중 한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다시 한 번만 사과를 딸 수 있게 해 주세요. 과수원 초입에서 정말 크고 좋은 잘 익은 사과를 봤는데, 더 크고 좋은 사과를 따기 위한 욕심에 그냥 지나쳤어요.” 또 다른 제자가 말했다. “저는 과수원이 시작되는 곳에서 정말 크고 좋은 사과를 봐서 얼른 땄는데, 몇 발자국 더 걷자 더 크고 좋은 사과를 봤어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세요.” 이 둘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했다. 소크라테스가 껄껄 웃고 나서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앎들은 얼마나 진실한가? 과수원 초입에서 최고의 사과라고 여겼던 앎과, 과수원 끝에 도착해서 자신이 딴 사과가 최고의 사과가 아니라는 새로운 앎 중에서 어떤 앎이 진실한가? 과수원 초입에서 욕심에 눈멀어 잘못된 앎의 노예가 되었다면, 과수원 끝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잘못된 앎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릇되고 편협한 지식에 기인한 온갖 주견들을 텅 비우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온갖 악지악각(惡知惡覺)들로 가득 한 업식(業識)을 녹이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순간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는 내면의 길 안내자인 다이모니온의 음성을 듣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여사미거(驪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 즉 나귀의 일이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도래했음이여! 아듀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