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개봉한 영화 <순수의 시대>는 19금 시대극이다. 제작 당시 내걸었던 영문제목은 Empire of Lust. 우리말로 직역하면 `욕망의 제국'쯤 되는데 여기에서의 욕망은 아주 강한, 또는 특히 애정이 동반되지 않는 성욕으로 구분한다. `역사가 감추고자 했던 핏빛 순수의 기록'이라는 카피로 관객을 자극했던 이 영화는 조선 건국 초 이방원과 정도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스토리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송창식이 만든 노래 <내 나라 내 겨레>는 대중가요의 서정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검열과 금지곡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음반에는 건전가요 한 곡을 반드시 수록해야 하는 강제로 인해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피맺힌 투쟁의 걸음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이거나,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로 절창하는 <순결>에 이르면, 독재 정권의 서슬에도 무언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뜨거움이 가슴 속에서 저절로 번지는 느낌이 있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끊임없는 권력 쟁취에 대한 욕망과 지배적 성욕을 `순수'로 포장하는 길항작용을 노렸을지도 모르겠다. 송창식의 노래 <내 나라 내 겨레>는 억압과 굴종의 시대에도 푸릇푸릇 살아남으며,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할 백성의 `순결'을 토대로 하는 힘으로 여전하다.
하얗고 작은, 세상과 미처 마주하지 못한 주검이 담긴 상자를 보면서 `순수'가 실종된 시대를 탄식한다.
죽음 앞에, 그 상자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는 슬픔으로, 불과 80분 만에 잇따라 숨진 신생아 4명의 비극에서 `순결'이 상실된 세상을 또다시 원망한다.
세상의 모든 드러난 것들은 모조리 위험한 것 뿐인가. 그나마 안전할 수 있는 엄마 뱃속에서의 평온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미숙아들을 돌보는 일은 가장 순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은 적어도 엄마만큼은 순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19살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 그깟 비닐봉지 2장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운 어른 편의점 점주는 겨우 6470원인 최저임금마저 제때, 제대로 주지 않으려는 탐욕으로 시대를, 그리고 청주를 또다시 욕되게 하고 있다.
열여덟 살 생일을 나흘 남겨두고 세상과 작별해야 했던 제주 음료제조 공장 실습생 이민호군. 지난 1월 전주에서 숨진 고객 콜센터 실습생 홍모양.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고장 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사망한 김모군.
세상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잇따라 사지로 몰아넣으며 여전히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른들은 흔하게, 그리고 별다른 주저함 없이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강요하면서 찬양하는 척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그럴싸한 위로 또한 그저 젊은이들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막막한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을 별개의 것으로 폄하하고 차별하려는 꼼수와 다르지 않다.
가장 순결한 곳이어야 하고, 가장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할 신생아실, 더군다나 온전하게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기력을 얻기 위해 혼신의 치료를 받아야 할 중환자실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금, 안심할 곳은 더 이상 아무 곳도 없다.
차라리 모든 사람들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니기를 바라지 않는 편이 낳겠다. 절대로 세상이 더 이상 순결하거나 청결하고 안전한 장소로 길이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환상일 수밖에 없음을 늘 각성하며 살아가는 게 편안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신생아실의 안녕과, 부모 자식 간의 간절하고 평화로운 만남마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극은 너무도 절망과 가까워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울 뿐이다.
2017년 한 해가 다 가도록, 그리하여 보다 나은 내년을 기다리면서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만큼 내 안에 숨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순수와 순결을 찾아봐야겠다.
수요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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