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들어가 슬픈 말 중에 꽃 소위가 있다. 6·25전쟁 당시 소위들의 생존율은 매우 저조했다고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진지에 웅크리고 있다가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소위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가장 먼저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이었던 그들은 적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꽃잎 떨어지듯 소위들이 쓰러지면 분노에 찬 병사들이 진지를 박차고 나와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이들의 주검 앞에 꽃 소위라는 말을 헌화했다.
군대 다녀온 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엉뚱한 상상에 빠진다. 내가 6·25전쟁을 겪었다면 나는 소대장의 돌격 명령에 진지를 박차고 나와 적진으로 돌격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전설의 고향도 못 보는 겁쟁이라 뭐라 장담할 순 없지만 소대장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소대장이 내 등을 윽박지르며 떠밀지 않는다면, 내 앞에서 먼저 피 흘리며 쓰러진다면 나는 적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없어도 그의 뒤를 따라 돌격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특히 군인은 거창한 애국심이 아닌 의리나 양심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니까.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을 뜻한다. 권위를 정의한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지휘나 통솔, 힘이 아니라 `남'이란 단어다. 여기에서 남은 물리적 거리가 철저히 배제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이다. 제아무리 힘이 세도 인간에 대한 동류의식이 없으면 권위는 생기지 않는다. 작금의 권위엔 강압만 있고 인간이 없다. 그러니 권위가 오염되어 권위주의로 변질한다. 꽃 소위들은 전장에서 언제나 맨 앞에 있었고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다독였다. 그게 병사들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는 꽃 소위들만의 권위였다.
권위의 변질 중엔 전염도 있다. 군대 내 갑질 대마왕 박찬주 육군대장 부인이 전염의 대표적인 예다. 진짜 권위가 뭔지도 모르는 어설픈 장군과 장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권위주의가 부인에게 시나브로 옮아간 것이다. 정식으로 권위를 위임받지 않았으니 인간에 대한 동류의식 따위는 애초에 없다. 공관병에 대한 욕설은 기본이고 베란다에 가두거나 썩은 과일을 얼굴에 집어던졌다 하니 오염되고 전염된 권위는 얼마나 사악하고 야만적인가. 말로는 장병을 아들같이 생각했다고 하지만 이들에겐 사용 연한 20개월의 소모품일 뿐이었다.
경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6월, 대구의 정 모 서장이 정년퇴임을 앞둔 지구대 팀장을 세워 놓고 30분 동안 면박을 주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 근무일지를 짜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많은 지구대 경찰관들이 팀장의 근무일지가 현장 상황에 더 적절했다며 꽃 소위처럼 팀장을 다독이며 편들었다. 정 모 서장 역시 권위가 지휘와 통솔과 힘에서만 나온다고 믿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야 어찌 백발이 성성한 팀장에게 징계 운운하며 막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얼마 전 페이스북에 사진 한 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장신중 경찰인권센터 소장이 서장으로 재직할 당시 운전병인 의경을 옆에 앉히고 식사하는 사진이었다. 대부분 서장들이 운전병을 식당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과 대조적이어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총경으로 퇴임한 그의 문장과 발언은 현 경찰청장보다 권위 있고 파급력도 세다. 인간에 대한 동류의식 때문이다. 집이나 직장에서, 하물며 술자리에서조차 권위가 떨어졌다고 느끼시는가. 그렇다면 병사들에게 친형제 같았던 꽃 소위들의 환한 웃음을 떠올리시라.
時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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