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와 지우개의 균형
낙서와 지우개의 균형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5.01.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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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은 우리 이야기

낙서와 지우개는 어떤 관계일까? 물리적으로 보면 존재하려는 것과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일 테고,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목표를 세우고 하고자 하는 결심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 뭔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우는 것과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등으로 가닥을 잡고 생각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사색의 소재는 대상을 꼼꼼히 관찰하는 도중에 샘솟거나 누군가의 말이나 글귀가 내 일상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 내 사유의 시간으로 들어온다. 그림책 <낙서가 지우개를 만났을 때/리오나+마르쿠스 글·그림/책빛> 또한 나에게 낙서와 지우개 같은 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준 책이다.

그림책 속의 낙서! 화가가 창작을 위해 무심히 또는 잊지 않으려 끄적일 때 도움을 주는 역할이 전부라 여기며 산다. 그러나 낙서는 여행을 떠나는 화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남김’의 존재일 뿐임을 알게 된다. 낙서의 주체였던 화가의 무존재, 화가의 손이 닿지 않아 할 일이 없어진 낙서에게 ‘할 일 없음’은 허무와 슬픔의 시간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낙서는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시쳇말도 있듯 낙서는 좋아했던 그림 그리는 일을 떠올리며 뭔가가 되어 보려 노력한다. 낙서의 앞길이 순탄하게 이어질까? 그럴 리 없다. 방지턱이 나타난다. 바로 지우개다! 너무나 깔끔해서 어떤 얼룩도 허용하지 않는 지우개는 늘 낙서의 뒤를 따라다니며 낙서가 남긴 그림을 지워버린다. 관점의 차이다. 그림이라 우기는 낙서, 엉망진창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 보는 지우개!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된다.

지우개에게 쫓겨가며 열심히 그림만 그리던 낙서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한다. 그리고 형태를 갖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낙서가 낙서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두자 지우개도 속도를 늦춘다. 낙서와 지우개의 관점이 평행을 이루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내가 늘 염두에 두고 수시로 끄집어내어 보는 부분이다. 선입견과 관점의 차이로 놓치고 가는 것은 없는지,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어설프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의 속도에 방지턱을 놓게 되는 부분이다. 낙서와 지우개가 나에게 꽂힌 이유일 것이다.

작심삼일이란 사자성어가 무색하지 않게 우리는 늘 결심하고 잊기를 반복한다. 새해에 접어들면서 나 또한 몇 가지 결심을 했다. 중간중간 끊기는 기록의 습관, 평생 해야 할 운동 등 대여섯 가지의 결심을 했다. 순간순간 지우개가 나타나 또 방지턱을 만들 것이다. 자명하다.

지우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오랫동안 묵힌 꿈이 있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꿈은 있을 것이다. 그 꿈을 향해 가는 길에도 지우개는 수시로 혹은 느닷없이 나타난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허무맹랑한 꿈은 아닌 걸까?’ 등의 이유를 들이대며 지우개는 꿈을 향해 가는 길에 방지턱을 놓으며 우리를 흔든다.

방지턱이 앞에 놓인다면 낙서처럼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라고 작가는 권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안전하게 돌아서 갈지, 비록 힘이 들더라도 넘어설지, 아니면 지우개와 손잡고 방지턱을 지운 후 깨끗하게 닦아 앞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방법이 눈에 보일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낙서와 지우개가 균형을 이룰 때 앞을 보는 눈이 밝아질 것이라 또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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