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 끝에 660년에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드디어 삼국통일이라는 큰 대업을 이룬다.
물론 고구려의 영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 한계도 있지만 이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영토 역시 우리 역사 속에 포함되었다. 신라는 기존의 영토보다 3배나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데, 그것이 9주 5소경이다.
오늘날 광역시의 개념과 비슷한 5소경은 각 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곳에 작은 서울을 설치하였는데, 옛 고구려 땅인 원주에 북원경을, 그리고 백제 땅인 남원에 남원경, 가야 땅인 김해에 금관경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충주지역에 중원경을, 백제의 옛 영토였던 청주지역에는 685년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게 된다. 이는 청주의 토착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별히 청주지역의 서원경에서는 백제문화의 기반 위에 점차 신라의 수도인 경주문화가 더해지면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곳 서원경이 지방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근거로 청주에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 `탁부(啄部)'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당시 서원경이 지방의 작은 도시가 아니라 수도 왕경인 경주에 6부제가 있었던 것 처럼 `사량부' `탁부' 등을 갖춘 큰 행정도시 였음을 추측케 한다.
이는 다른 소경에서는 없는 톡특한 부제로 청주 서원경이 제2의 수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 된다.
한편 서원경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 정창원에 있는 촌락문서(신라장적)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장적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8~9세기 경 서원경 4개 마을의 인구와 토지, 가축, 과일나무 등이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원경 지방 4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민정문서 또는 신라촌락문서, 정창원문서라고도 부르는 이 문서는 1933년 일본 도다이사의 쇼소인(정창원)에 소장된 13매의 불경 중 파손된 `화엄경론'의 책갑을 수리할 때 내부의 포심에 덧붙인 휴지 중에서 이 문서가 나왔다. 아마도 청주 미원지역의 어떤 촌락에 관한 기록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 신라 시대 서원경의 생활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용담동에 묻혀 있었다.
용담동 통일신라무덤은 동부우회도로에서 목련공원으로 향하는 교차로에 있었던 25기나 되는 무덤유적이다.
청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 유적으로 무덤의 형태는 구덩이를 판 후 깬돌을 이용하여 4벽을 쌓아 만든 돌덧널무덤이다. 무덤 바닥에는 시신이 놓일 수 있도록 잔돌과 시신이 고정용 쐐기돌 같은 것을 목과 허리 부분에 고인 흔적도 있다.
껴묻거리(유물)는 도장무늬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당시 상류층을 상징하는 청동허리띠장식이 나와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무덤은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청주의 대규모 무덤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무덤과는 달리 좁은 지역에서 많은 무덤이 만들어져 일정한 세력을 가진 집단의 무덤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거 통일 신라의 문화적 행정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제2의 수도 서원경 청주시가 21세기 중부권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며 통일 한국을 선도할 미래 지향적 도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길 소망한다.
충북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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