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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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4.07.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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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5학년 1반 빨리 들어와.”

운동장에서 놀다가 소리가 나는 곳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울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출장가신다던 선생님이 화가 난 얼굴로 우리들을 부르고 있었다. 모두 겁을 잔뜩 먹은 상태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쏜살같이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반장, 부반장 앞으로 나와.”

머뭇거리면서 나가자 선생님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분단장인 나는 눈에 불이 번쩍 튀는가 했는데, 한쪽 마루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놈들아, 아침에 출장가려고 하다가 안경에 아침 자습은 안하고 딴 짓하는 것이 보여서 학교로 왔다. 선생님 안경은 너희들이 멀리 있어도 모두 보인다.”

선생님이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책보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잠시후 선생님이 예정대로 출장길에 나가셨다.

그후로는 선생님이 보이지 않아도 늘 공부는 물론 모든 학교생활에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선생님이 안경으로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실테니까.

선생님은 5학년과 6학년 2년동안 담임을 맡아 열심히 공부할 것과 사람됨됨이에 신경을 쓰시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아버지같은 분이셨다.

선생님이 사시는 집이 우리 집 이웃에 있어서 마을에서 자주 만나게 되어 자연히 모든 행동에 조심스러웠다.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선생님은 항상 건강해 보이셨는데, 어느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집 친구 성안이와 선생님 문병을 갔다. 늑막에 물이 고이는 습성늑막염으로 한달여 기간 입원 치료를 받으시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님께 빈 손으로 얼굴만 뵙고 나오는데 집에 갈 차비를 주시면서 고마워 하셨다.

선생님은 시내가 멀어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한 의사이셨다. 어느 누구든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보살펴 주어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6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진학을 앞둔 시점에서 선생님은 여러모로 신경이 서는 것은 물론 졸업후의 방향에 관심을 쏟으셨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인원은 63명중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졸업식날 성적우등상을 받고 쓸쓸하게 집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집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내는 날이 거의였다.

선생님을 본 날이 얼마나 되었을까 했을 때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렇게 선생님은 나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가금국민학교를 졸업한지 많은 세월이 흘러간 어느날 음성고등학교에 계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의 옛 모습은 변하지 않으셨을까. 지금도 늘상의 얼굴 그대로이실지에 궁금함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가면서도 선뜻 만나 뵐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다시 세월이 가고 또 간 늦은 날에 충주 교현동에 살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교육청에 알아본 후에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몇번의 전화후 다행히 연결이 되어 40여년만에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을 찾아 뵙겠다는 말씀을 드리자, 이 전화로 만난 데에 의미를 두자시면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외로움의 세월을 지내 오신지 오래 되어 그러시는 것 같았다.

그동안 외동딸이 시집가고 나서 함께 살던 사모님도 저 세상으로 가시자 혼자 남은 선생님은 전국으로 여행겸 돌아다니시다가 4개월에 한번 집에 오신다고 하셨다.

여운창 선생님.

그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어린 날의 은혜를 내내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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