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길목에서
봄의 길목에서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4.04.1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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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찬바람이 나를 맞는다. 이곳은 십여 년 전 남편이 만든 작은 쉼터다.

친구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사랑방이었다. 몇 년간 이곳은 화기애애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음식을 해 먹으며 정을 쌓아가는 그들이 보기 좋아 나는 가끔 김치, 된장, 고추장 등을 냉장고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고 친구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먼 길을 떠났고, 쉼터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더는 쉼터가 아니라 빈터가 되어버렸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나는 우주의 미아가 되어 서 있는 날이 많았다.

요즘은 내게 주어진 일을 처리할 때 남편에게 상의하듯 자문자답을 많이 하게 된다.

코끝이 찡할 만큼 바람이 매운 며칠 전이었다. 봄은 아직 먼 듯 초목은 기척이 없고, 새들만 나뭇가지 사이를 포르릉 날아 오르내렸다. 나는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웅크리고 봉학골 지방 정원을 걸었다.

얼마를 걷다 보니 검은 땅 위에 모래더미 같은 작은 무더기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누가 모래를 한 삽씩 부어 놓은 걸까.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모래에서 나는 광채가 없었다. 알갱이 하나를 집어 들고 비벼보았다.

힘없이 바스러졌다. 그것은 모래가 아니라 개미들이 뭉쳐 놓은 흙 알갱이였다.

한참을 더 지켜보니 개미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밖은 아직 얼음으로 덮여있지만, 우수경칩이 지났으니, 지열로 인해 땅속은 이미 봄이 당도 한 것 같다.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자 낡고 허물어진 곳은 보수도 해야 하고, 새로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 안전한 집도 필요했으니 그리 바삐 움직인 것이리라.

파낸 흙을 침으로 뭉쳐 밖으로 내다 버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흙덩어리가 그리 높이 쌓인 것이었다. 개미들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그 자그마한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것은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힘을 합쳤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더 지켜보았다.

나도 빈터를 수리해 쉼터로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빈터의 먼지 쌓인 물건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남편의 우정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깃든. 소파, 시계, 운동기구 수납장 등이 마당 한쪽에 수북하게 쌓였다.

쓸 수 없는 것들은 버리겠지만, 수리가 끝나면 물건들은 용도에 맞게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수 경칩에 담을 쌓거나 벽에 흙을 바르는 풍속이 있다. 이는 봄을 맞아 집안을 정돈하면서 한해를 어그러짐 없이 잘 보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한동안 적막했던 빈터가 소란스럽다. 활기라고는 없던 곳에 자재 나르는 화물차가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전에 남편이 하던 것처럼 나도 공사 현장을 살피며 관리 감독한다. 나무 자르는 소리와 망치 소리가 울린다. 흑백 사진으로 멈추었던 공간이 소란스럽다. 봄의 길목에서 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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