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것들 - 여의초
포기를 모르는 것들 - 여의초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4.04.16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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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꽃은 피지 않았다. 그렇다고 잎이 제대로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주 무서운 녀석인 것을 단숨에 알 수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돌아섰던 그 자리에 섰다. 손에는 작은 삽이 들려있다. 매서운 매의 눈으로 한 곳은 뚫어져라 응시한다. 꽃이 예뻐 애써 가꾸려면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고, 잡초라 여겨 뽑아버리면 어느샌가 뽑힌 자리에 또 싹을 올리며 튼실하게 자란다. 나가기도 잘하고 몰래 들어오는 신출귀몰한 녀석이기에 놓칠 수 없다는 각오다.

드디어 표적에 들었다. 언제 도망갈 줄 모르니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리고 한 뼘 앞에서 삽을 질러 넣는다. 손잡이에 힘을 주고 흙을 들어 올린다. 성공이다. 커다란 나무 분을 뜨듯 파냈으니 제아무리 날쌘 놈이라도 도망은 못 갈 것이다. 흙을 헤집어 가며 뿌리를 끄집어낸다. 산삼 캐듯 조심스럽게 흙을 헤쳐낸다. 자칫 잘못했다가 뿌리가 끊어지는 날에는 찾기도 힘드니 여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임무 완수, 아직 크지도 않은 잎 두 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뿌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 포기가 아니었다. 이제 순을 올리려는 두 포기를 포함해 세 포기가. 순이 제법 나온 뿌리는 중간에서 갈라져 있다. 한 뿌리가 갈라져 세 포기가 된 것이다. 이런 기형이 어디 있을까? 임무 완수라고 하기엔 뭔가 불안하다. 털어낸 흙을 다시 헤집어 본다. 실오라기 뿌리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젠 안심이다.

보라색 꽃을 무척이나 많이 피웠다. 분명 한 포기다. 그런데 꽃대가 무려 8개다. 하늘을 나는 제비를 닮았다 하는데, 제비가 떼거리로 날 기세다. 참으로 기이하다. 기형도 이런 기형이 또 있을까? 캐내고 싶어도 캐낼 수가 없다. 단단한 시멘트의 갈라진 틈에 야무지게 들어앉았다. 벽돌로 쌓아 올린 벽틈에도 한 포기가 꽃을 피웠다. 바닥이고 벽이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캐내는 것은 포기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포기째 쥐어 잡고 뽑는다고 용쓰겠지만 분명 끊어질 것이고, 다시 싹을 틔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산삼이었거나 인삼이었다면 뇌두가 잘 형성되었을 것이다. 분명 몇 년 묵은 녀석일 것이다.

다섯 개의 꽃잎 중 아래쪽 가운데의 꽃잎은 벌이나 나비가 앉을 수 있게 되어있다. 활주로의 이착륙을 돕듯 선도 선명하게 잘 그어져 있다. 벌이 앉는 즉시 바로 꿀을 빨 수 있을 듯하다. 꿀을 담은 꿀주머니는 뒤쪽에 숨겨놓고 능청스럽게 하늘거린다.

꽃을 보려면 무릎을 꿇고 볼 수밖에 없다. 향을 맞아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향을 맡으려면 가슴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할 판이다. 그래서 앉은뱅이꽃이라 하던가?

다섯 개의 꽃잎을 단 꽃대가 일렬횡대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사열이 진행될 듯 자리를 잡았다. 빗물에 쓸려 더 이상 갈 곳 없는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인데, 따스한 햇살을 자양분 삼아 건재하게 자란 군인이 된 듯하다. 조만간 꽃이 지며 꽃씨를 달고 무한대의 예포를 쏘듯 씨를 멀리 보낼 것이다. 그래서 장수꽃이라 하던가?

제거한다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끊임없이 순을 올린다. 꽃이 예뻐 그냥 두고 했던 후회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보이는 족족 뽑는다고 했지만, 땅속 깊숙한 곳의 뿌리를 캐내지는 못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실오라기 같은 뿌리가 살아 실뿌리를 만들고 키워 꽃대를 올렸다. 날렵하고 잽싸게 먹이를 낚아채며 날아오르는 물찬제비를 품고 버텼다. 습하면 습한 대로, 건조하면 건조한 대로, 심지어 비가 올 때만 물맛을 볼 수 있는 시멘트 안에서도 버텨냈다. 성실과 겸손을 기본으로.

그러함에는 땅속의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포기란 없는 것이다. 꽃대가 잘리면 잘릴수록 포기는 많아진다. 만사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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