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아니 백 번
열 번 아니 백 번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04.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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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봄을 마중하러 간다. 내가 사는 음성은 워낙 봄이 더디 오다 보니, 이럴 땐 봄을 일찍 만나러 삼삼오오 길을 떠난다.

올해는 광양 매화 꽃밭이다. 몇 해 전 코로나19 시국임에도 벚꽃을 보러 김천 연화지에 다녀온 후 터득한 방법이다. 봄이 먼저 도착하는 길목으로 버선발로 맞으러 가는 것이다. 종일 꽃에 취해 거닐다 돌아오니 이곳은 아직도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마지막 꽃샘추위로 인해 더욱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얼마 후 드디어 음성에도 봄이 당도하여 여기저기에서 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했고, 그해의 봄은 두 배, 세 배로 길게 느껴졌다.

오늘을 손꼽으며 기다렸다. 문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떠난 길이라 더욱 좋았다. 오랫동안 낯을 가리다가 이제야 편안해진 분들이다. 미리 간식이며 물이며 필요한 것을 준비한 분들이 있어서 더욱 감사했고, 비슷한 연배의 문인과 잔잔한 대화를 나누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좋았다.

아랫녘으로 내려갈수록 봄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 무채색인 산과 들을 배경으로 고운 색을 칠해 놓은 것처럼 눈에 띄기 시작하는 산수유와 매화가 너무도 반갑다.

지금껏 매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파트 주차장 화단에서 매년 피는 꽃은 어느 해인가 위층 할머니가 매실을 따는 것을 보고서야 매화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벚꽃, 살구꽃, 자두꽃 구분도 어렵다. 그저 설중매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제일 먼저 피는 게 매화려니 했다. 그러나 푸른색 목도리처럼 펼쳐진 섬진강 변에 조성된 매화밭은 상상을 초월한 장관 그 자체였다.

매화가 이렇게도 화려한 꽃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 끝도 없는 광활한 규모에 입이 벌어졌다.

절정이었다. 청매화, 홍매화, 축축 늘어진 능수매화, 매화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노란 빛의 산수유까지 어느 것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잘 조성된 오솔길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에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커다란 돌에 새겨놓은 시를 만날 때는 잠시 멈춰서서 감상에 젖기도 했다.

갑자기 봄의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한 것처럼, 겉옷을 벗어들고서도 꽃그늘을 찾아 들 만큼 따뜻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환경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일까. 사람들 모두 밝은 표정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지나치는 사람들과도 환하게 인사를 나눈다. 사랑스럽고 상큼한 커플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도 있다.

비탈이 많아 노인을 모시고 다니기가 힘이 들 텐데 연신 웃으며 부모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어르신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좋아하신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은은한 꽃향기가 아직도 나를 감싼다. 화려한 매화밭의 전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매년 돌아오는 봄이지만 한 해 한 해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이 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안타까운 눈길로 만개한 꽃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겠지. 스러져가는 꽃을 보며 애잔하여 가슴 저린 순간이 오겠지. 내년에는 나도 어른들을 모시고 꼭 한번 다시 가야겠다. 매화 향기 가득한 꽃밭에서 아직 정정하시다고, 열 번 아니 백 번은 더 보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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