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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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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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집으로 돌아온 탕자와 집안에 있는 탕자
형제들 간에 부모의 유산 문제로 싸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노부모를 안 모시겠다며 책임을 전가해 싸우기도 하고, 생활수준 차이로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가정도 있다.

그래도 부모가 계심으로 모일 수 있는 것을 감사하며 행복으로 여겨 집안과 이웃 간에 두터운 정을 일깨우는 가정도 있다. 성경 눅 1511∼30에 나오는 탕자의 가정을 말하려 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갖고 외국에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생활하다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탕자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잘 보존하고 집에서 성실하게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크게 책망받은 것은 큰아들이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고, 새옷과 새신과 금가락지를 끼워주며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큰아들은 이런 아버지가 못마땅히 여겼고, 동생을 꾸중하며 불평을 했다.

성경 눅1528-30에는 "저가 노해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원컨대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것으로 즐기게 하신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했다.

작은 아들은 물질을 탕진한 물질적인 탕자라면, 큰아들은 형제의 사랑을 잃어버린 정신적인 탕자다. 물질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므로, 물질적인 탕자보다도 형제의 사랑을 상실하고 사는 정신적인 탕자가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큰아들을 꾸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용서하고 회개를 기다린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모든 죄를 용서했다.

주께서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잘못 생각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회개하는 정도를 보고 용서해 준다는 것이다.

먼저 용서해주고 그 다음 회개를 기다리는 이가 주님이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와 같다. 탕자를 용서해 주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문 밖에 서 있었다. 형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질 않았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기에 더 이상의 탕자가 아니다.

큰 아들은 몸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와 동생으로부터도 떠나 있으면서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진정한 사랑이란 가족과 이웃, 교우 간에 고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큰아들은 포옹하는 마음과 용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로를 용서하는 사랑과 포옹하는 희생적 사랑만이 자기 손해와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아가페적인 거룩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빅틀위고 작품 '레미제라블'을 보면 주인공은 빵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결국 교회로 들어가 은식기 하나를 훔쳤고, 순찰 중인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은 그를 데리고 교회로 찾아가 사제를 만났고, 사제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더니 장발장에게 "그것은 내가 네게 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함께 준 촛대는 가지고 오질 않았느냐"고 말하자 경찰은 할 말을 잊은 채 장발장을 그 자리에 두고 가 버렸다.

그 순간 장발장은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20년의 옥중 생활에서 복수심에 가득 찼던 그가 사제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면서 복수심은 사라지고 새사람이 됐다. 마음속 깊이 품었던 복수심이 사제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에서 해결된 것이다.

용서가 먼저인가 아니면 회개가 먼저인가 물론 용서가 먼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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