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 부장>
  • 승인 2014.04.2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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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 부장>

이 지경인데 말을 에둘러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드러나지 않거나 깨닫기 어려운 상징 또는 은유를 통해 직설되지 않는 언어 역시 이쯤이면 참말로 부질없는 짓 아닌가.

더 이상 이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부끄러울 지경이고, 이 땅을 버리고 떠나겠다는 말조차 숨김없이 터져 나오는 이 비극 앞에 어쩌면 글 쓰는 일 마저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토록 무기력한 나라와 백성들 조차도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역시 또 그렇고, 여전히 별 수 없다.

나는 지난 주 <충청논단>에서 소 잃고 와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소를 잃어 버렸으니 당분간 소를 키우지 마라는 궁색한 처방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리하여 이 땅에서 살기가 싫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우려를 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나라의 모든 초·중·고 수학여행 전면 중지라는 뻔한 처방이 여지없이 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실낱같은 희망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비통함에 한반도가 물에 빠진 솜처럼 무겁게 젖어 들고 있다.

참 나쁜 사람들이다. 채 꽃 피우지 못한 어린 핵생들은 무너지는 배 안에 가둬두고 저만 살겠다고 먼저 빠져 나온 뱃사람들도 그렇고, 또 일말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허둥거리는 재난 관리 시스템도 그러하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 딸들이 깊고, 차갑고, 무섭기 그지없는 바다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비통함에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는 부모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관료들과 철없는 백성들의 작태 역시 참 나쁘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선실에서 대기하라’,‘선실이 안전하다’는 어른 뱃사람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구명복을 입은 채 자신들에게 덮쳐오는 공포를 견뎌내야 했던 그 무한한 믿음의 몰락일 수 있겠다.

그 착하고 여린 순수가 어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골 깊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무거운 사회적 불신의 무게는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법률과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잘못의 무겁고 가벼움이 가려질 것이고, 이에 따라 추상처럼 준엄한 처벌이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위, 아래를 막론하고 책임회피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음은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온 국민이 뼛속 깊이 반성하여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빙자해 막말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상처쯤이야 아랑곳없는 공동체의 실종에 온 백성이 분노한다해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클라우치는 "국가가 민생을 돌보는 데서 퇴각하여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냉담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기업은 -적잖이 의식되지 않는 가운데- 국가를 셀프서비스의 상징처럼 이용한다. 그걸 깨달을 수 없는 게 바로 지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는 자유방임주의적 사고의 기본적 순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직 뚜렷한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이번 세월호의 국가적 재앙의 이면에는 기업의 멈추지 못하는 탐욕과 어김없이 재론되는 관료의 특권의식, 정치권 로비설 등의 못된 버릇은 여전하다.

이제는 좀 우리 사회가 보다 진실되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달라져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이 존중되어야 하며, 사람이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이라도 절실하고 진지하게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더 이상 그럴듯한 이미지에 속지 말고, 더 이상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탐욕의 쇼가 사회 전반에 만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 백성이 감시의 부릅 뜬 눈을 밝혀야 한다.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의 선택을 두려워 하도록 세상의 모든 모순된 권력에 강력한 경종을 울려야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울부짖는 살아 남은 자의 한숨과 탄식이 거듭되는 세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 다만 운이 좋아/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는 것을// 그러나 오늘 꿈속에서/ 나는 들었네/ 친구들이 내게 말하는 것을/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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