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네 박자
달은 네 박자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03.2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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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자동문이 열리면서 카페 안에 갇혀있던 음악이 연기처럼 쏟아져 나온다. 아들의 노래다. 아니 아들이 만든 곡이다.

가끔 지인들이 뜻밖의 장소에서 아들의 노래를 들었다는 말은 했지만, 밖에서 내가 직접 접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노래는 이미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아 앉는 동안 노래는 어느새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우연히 아들을 만난 듯한 반가움의 여운은 한참 동안 쉬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는 막 귀촌하여 형편이 너무도 안 좋았을 때였다. 모든 환경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우리는 쪼개고 쪼개 피아노부터 샀다. 오랫동안 버겁게 할부를 갚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늘 아름찼다. TV는 실외 안테나를 통해 보고 인터넷을 모뎀으로 하던 시절이었으니 피아노는 아이들의 좋은 친구이자 장난감이 되었다. 아랫마을 친구들까지 모여와 종일 뚱땅거리면 피아노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피아노 학원에 가려면 차를 타고 괴산 읍내까지 직접 데려다줘야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직접 악기를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럴 때마다 오래전 피아노를 포기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나는 음악에 소질이 없었다.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접할 수 있게 한 이유는 음악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쓸쓸하거나 좌절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아이들 곁에 음악이 함께하고, 그 음악을 통해 힘든 시절을 조금은 수월하게 이겨나가기를 바랐다. 내가 한때 이어폰을 귀에 달고 살면서 김광석이나 김민기의 노래로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아이들이 살아갈 거친 세상에도 늘 좋은 음악이 곁에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 모두 재미있어했다. 특히 큰아들은 스스로 연습하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가 내 걸었던 조건은 단 하나. 중단하기 없기였다. 어설프게 그만두면 차라리 안 배운 것만도 못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곧잘 하던 큰아이가 입시를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작곡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잠시 후회했다. 단 한 번도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들은 오래전부터 고민하다가 털어놓은 듯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부모 앞에 앉아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아들에게 이번에도 또 단 하나의 조건을 말했다. 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그만두라고.

아들의 노래가 나오는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보고, 아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운전할 때마다 듣는다. 특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듣는 노래는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과 어울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바쁘게 살며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음악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이제 음악을 통해서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열렬한 팬이 늘 곁에 있으니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고맙다고 응원을 보낸다.

언젠가 아들에게 노래를 만들면서 무엇이 가장 좋으냐고 물으니 그저 웃기만 한다. 딸아이는 가끔 잔잔한 곡을 연주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막내아들은 주일 새벽 미사에서 성가를 반주한다. 삼인 삼색이다.

아이들이 음표를 배우기 시작할 때쯤 온갖 사물에 박자를 붙이며 놀던 시기가 있었다.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온음표는 네 박자. 엄마! 보름달은 네 박자예요!” 하던 생각이 난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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