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미자립 사고와 이별할 시간이다
이제는 미자립 사고와 이별할 시간이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4.03.1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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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아버지는 목사이고 어머니가 목사 집안의 딸인 둘 사이에서 개신교 성골로 태어난 프로이트 니체, 위로 그 조부까지 뼛속 혈통인 그가 어쩌자고 신의 죽음을 외치고 페르시아 조로아스터인 차라투스트라를 세워 강력한 주체 자립을 요구하며 이 시대를 앞서 살다 간 걸까?

알아야 했다. 신의 죽음과 정신 발전을 종용하며 상징으로 내세운 용의 실체와 명령, 낙타와 사자, 어린이까지 제대로 알아야만 이 짧은 삶을 온전한 정신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30여 년 긴 시간이 언제 풀릴지 모를 겨울 냉담에 들었다. 더는 내 안의 내가 착함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화된 신앙 환경에 분노한 때문이다. 종교가 주는 순기능에 매달려서라도 끝까지 붙들고 싶었던 아니 지켜내고 싶었던 신앙, 중학교 2학년 겨울 무렵 인근 숲속에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끌려 스스로 찾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던 곳, 가난한 전도사 부부를 통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섬김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신앙은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마음가짐 아래 삶 속 배려, 나눔, 섬김을 자연스럽게 생활화하며 살았다.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환영을 본 이후로 그의 존재를 굳건히 믿으며 신앙의 정조를 지켜왔다. 어쩌면 비판의식 강한 내게 그런 체험이 없었다면 기독교 성경 역시 창조 설화로만 읽혔을 것이다.

`내게 강 같은 평화'로 내 인생의 축대로 작용하던 신앙관은 2020년 시작된 코로나와 2023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 그 여러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에 대한 염증과 회의로부터 시작됐다.

표면적 명분을 차치하고라도 인간 욕망의 피라미드 정점에 꽂힌 비릿한 음흉을 곁눈으로도 흘깃 봐선 안 될 패까지 보았으니 비탄이 말을 타고 달린다. 신을 떠난, 아니 신마저 떠나게 한 무자비한 욕망은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애꿎은 국민을 선동하여 아수라장으로 몰았다.

매일 밥 먹는 일처럼 습관에 갇힌 우상화된 신념을 내려놓고 저만치 거리를 두고 보니 구토가 일어난다. 이 땅에서 의지박약한 인간으로 살도록 양 떼 몰이 하는 거짓 용들의 실체를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착해빠진 사람들, 신마저 그 어느 편도 들지 못할 비틀린 세상을 꾸려놓고 복을 기원하니 염치없는 세상이다. 본래의 가치로 순수하게 회복하고 최초의 동인, 어린이 정신으로 돌아갈 때 신은 그 안에 다시 깃들 것이다.

신의 죽음을 외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환영으로 시장 한 복판에 나타나 `신은 죽었다', `힘에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를 외친 광기어린 내용을 다시 살펴본다. `더없이 추악한 인간'에 의해 신은 타살된 것인가. 그런 추악한 인간을 만든 괴로움으로 신 스스로 자살한 것인가. 그 본래의 목적을 돌아본 시간이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은 최초이며 최후인 실천가로서 그리스도의 떠남이며 근대 형이상학적 경계 짓기의 죽음이다.

명령하는`용'의 실체를 의심 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노예도덕을 장착하고 사는 낙타의 삶이다. 이제는 미자립 사고와 이별할 때다. 본래의 가치를 찾아 앙상한 양심이라도 지키며 불의에 저항하는 건강한 사자정신이 필요하다. 복종보다는 자유를, 죽음보다는 생명을 심어주는 종교와 국가로 바로 서는 엘리트 세상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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