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할배
갑산할배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4.03.0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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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어쩌다 보니 도롯가에 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대문 밖은 도로이며 삼거리여서 시골이라 해도 그리 적막하거나 적적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문 밖은 널찍한 삼거리,건너편엔 중학교가 있고 드문드문 집들이 산재해 있으며 길가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어 봄에는 꽤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도 해서 그럭저럭 정붙일 수 있는 것 같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마당 옆으로 20여 평의 작은 텃밭도 딸려 있다.
봄이 다 지나갈 무렵인데도 나는 손을 쓸 수 없어 버려두는 바람에 덤불과 쓰레기 등이 뒤덮고 있었다.
이웃들이 흉볼 것 같아서 이제라도 마음먹고 텃밭을 일궈야겠다고 흙을 뒤엎기 시작했을 때였다.
시꺼먼 장화를 질질 끌면서 갑산할배가 바쁘게 오셔서는 삿대질까지 하면서 야단이시다.
“우리 밭인데 뭐 하는 거여? 빨리들 나가, 어서! 내 땅이여, 내가 다 산 거여”
동그랗게 말린 합죽한 입속에 거품까지 물고 성화 시다.
“아, 저 할아버지.”
며칠 전 교교하도록 적막한 밤중에 큰 소란이 한 번 있어서 익히 알고 있는 이웃집 할아버지이시다.
그날 밤에도 누군가 현관문을 세게 두드려서 겁을 잔뜩 먹고 조심조심 문을 열었는데 대뜸, “누구여? 내 집인데 왜 문까지 잠그고 있는 겨?” 씩씩 거리면서 밀고 들어와 얼마나 놀랐던지….
뒤쫓아 온 아들에게서 사정 얘기를 들었으니 망정이지
“내 땅이여, 내가 다 산 것이여!”
할아버지는 잠이 들 때도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잠이 드신다고 했다.
<측량기사 김 씨!> 젊은 날 할아버지를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한다.
“측량이 하나도 안 돼 있더라구, 저 넓은 만주벌판 세부측량은 내가 다 했다구!”
“내가 다 했다니깐, 세부 측량허는데 7년이나 걸렸다구.”
헐어빠진 지까다비 끈 질끈 동여매고 만주벌판 누비던 측량기사 김 씨는 돌아와 이천여 평 노른자위 땅 다 사들이며 떵떵거렸겠다.
그러나 세월은 비껴가지 않아 자식들 키우느라 땅은 남의 손으로 들어갔고 엎친 데 겹친다고 노인은 치매까지 깊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측량기사 김 씨의 기억 속에서만 사는 것이다.
엊그제도 그랬다.
모심기 위해서 가득 물을 채워놓은 논에서 시원하게 물꼬를 트는 할아버지
“그려 그려, 바짝 말라야 여무는 기여!”
좔좔 조르륵 조르륵 물 빠지는 소리를 노랫소리처럼 흥겹게 듣고 있다가
“도대체 왜 그런데유, 이십 년 전에 다 팔아먹었잖어유, 남의 논 모내기할 건데 물 다 빼버리면 어쩐대요! 이젠 물어줄 것도 ?슈쨉?..”
헐레벌떡 쫓아 온 아들에게 끌려 나오는 할아버지는 아직도 만주벌판 독새기 풀들 연신 나풀거리는지 젊은 날의 빛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니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 행복한 것인가?
할아버지는 또 추적추적 텃밭에 들어가신다.
“내 땅인디, 내 땅이여.”
“남의 채소 으깨지 말고 당장 나가유!”
배추머리 영자 엄마가 투가리 깨지는 소리로 하는 삿대질에
비칠비칠 밀려나는 할아버지,
“요상헐 새, 내 땅인디, 말세여, 뭔 세상이 이런디여”
굽은 허리 굳추세우려다 말고 상추잎처럼 밭둑에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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