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우
몽우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4.02.2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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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뜰 안의 살아 있는 것들이 같은 색으로 맞췄다.

색을 갖춰 치장한 것이 아니다. 본래 어떤 색이었는지 몰랐다면 워낙 그런 색이었거니 할 것이다. 모조리 희끄무레한 갈색이다. 움츠림에 색을 잃고, 드러내지 못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주변을 에워싼 공기마저 날카롭게 서릿발을 세웠다.

검은색 차를 완전히 둘러싼 보호막인 듯, 누구의 손길도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의 완전무결한 막이었다. 주머니에서 갓 빼낸 손을 내민다. 손가락이 끝이 서릿발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날카롭고 도도했던 서릿발은 햇살이 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물러났다. 곧추세웠던 서슬 퍼런 날들이 무뎌지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관된 색의 한가운데 초록의 한 무리의 색이 드러났다. 낙엽 아래 은신처로 자리했던 잡초들이 힘을 줬나 보다? 그래봐야 아직은 몸을 사리는 기지개 정도겠지만, 살짝 들어 올린 잎의 끝, 약한 바람에 덮여있던 낙엽이 자리를 비켰다.

한낮으로 따뜻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이제 존재를 보여줄 참이다. 바람마저 멎었다. 땀이 송골송골 나나 보다? 이슬이 맺혔다. 아직 이른 감이 있는데, 서두르는 건 아닌지 싶다.

가로등 불빛이 꺼질 즈음 바람이 심술을 부린 듯하다. 차량에 맺힌 이슬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앞 유리창이 햇살을 받고도 쉽사리 흘러내리질 못한다. 존재의 과시를 서두른 잡초들은 무탈할까? 매번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 이미 모습을 드러낸 잡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제 대지는 숨을 가쁘게 쉴 준비를 하나 보다.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가 산등성이를 타고 오른다. 새벽, 이슬 맺히는 날이 잦아졌다. 색을 잃었던 낙엽이 촉촉하게 젖는다. 희끄무레한 갈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했다.

한결 깊어지고 안정된 색이다. 그런데 차분하게 내려앉아야 할 낙엽이 들떴다. 중간중간 봉곳하게 솟아올랐다. 땅을 뚫고 나오는 당찬 비늘 무더기다. 흙을 제치는 소리하나, 낙엽을 헤치는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연한 녹색의 비늘이 땅을 뚫고 나오던 날, 밤에 비가 내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빗방울의 크기도 보여주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뿌연 안개처럼 나긋나긋하게 흩날렸다. 밤이 깊어져 가면서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희미해져 갔다. 수명을 다한 전구가 빛을 잃어 아련하게 보이는 형체가 되었다.

아침이 되어 디딤돌이 젖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린 것을 알았다. 밤새 내린 비는 고이질 않았다. 밤새 꿈을 꾸었는지 모를 일이다. 안개였는지 비였는지 모를 일이다.

서두른다는 것을 알면서, 겨우내 덮여있던 낙엽을 걷어 주었다. 자칫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어렵사리 나온 순이 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몸이 앞섰다.

등줄기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느끼며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침부터 흘린 땀이 비가 되었나 보다. 오후 늦게 시작된 비는 밤새 내렸다. 한낮 지친 몸은 쉬 잠에 취하지 못했다. 낙수 소리는 한여름 빗방울 소리인 듯, 이러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 좀 더 기다렸다가 걷어 줄걸 하는 생각에 뒤척거리며, 밤새 낙엽을 걷고 덮기를 반복했다.

한해도 거른 적 없는데, 매년 겨울을 이겨내는 힘은 부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조급해져만 간다. 진창에 절벅절벅 걷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한스러운 상황에, 뜰 안의 나무는, 살아있는 것들은 늘 그래왔듯 때를 기다리고, 이겨내며, 때에 맞춰 훌쩍 자란 강인한 모습이다. 소리를 낸 적 없다. 보여주려 한 적 없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늘 초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자욱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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