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짧으면
칼이 짧으면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23.12.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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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씨앗 한 톨
유리병과 액자.
유리병과 액자.

 

“칼이 짧으면 그만큼 한 발자국 나아가라”는 뜻을 지닌 `시단검일보전진(是短劍一步前進)'이란 말을 잊고 지냈었다. 되짚어보니 2020년 6월의 어느 날 돈독히 여기는 군대 후배에게 인사차 카톡으로 보냈던 말이었는데,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새로운 리더가 취임 일성으로 똑같은 말을 해서 적잖이 놀랐다.

말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가 먼저 쓴 언어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관계의 줄을 타면서 입에서 입으로, 입에서 글로, 글에서 글로, 글에서 입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탓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 `시단검일보전진'이란 일곱 글자는 나와 인연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들어서 옮겼던 말을 시간이 흘러 다시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는 경험까지 했으니 말이다.

며칠을 두고 그 말의 뜻과 인연의 오묘함을 곱씹었다. 그래도 먼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일을 벌였다. 캘리그라피용 붓펜을 들고는 세로쓰기로 그 말을 종이에 옮겨 적는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아무리 혼자 놀기라고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의 한자(漢字) 글씨는 족보도 계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기만족에 그쳤으므로.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이를 어쩌란 말인가. 아예 한술 더 뜨고 말았다. 글씨를 작은 액자에 넣어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 옆의 협탁(狹卓) 위에 놓았다. 나름 묘수를 짜내어 난초 잎 모양을 띤 식물을 담아 놓은 유리병 곁에 액자를 두었다. 공중으로 뻗어나가다 늘어진 잎이 내 제멋대로 글씨를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것도 좋았고, 잎의 생김새가 날렵한 검객의 칼을 떠올리게 해서 즐거웠다.

연거푸 쓰게 되는 말의 인연을 갈무리해 두는 것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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