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군림하지 않는다
선은 군림하지 않는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3.11.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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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우주를 향하는 통로인가. 얼굴 대신 커다란 구멍만 뚫려 있을 뿐 무상이다. 휴머노이드 같은 이 형상이 뇌를 혼란케 한다.

얼굴 전체를 텅 빈 구멍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일본 다카시마 히데오의 <텅 빔으로 채워지다>라는 도자이다. 강재영 외 9인이 공저한《사물의 지도》를 참고하면 다카시마 히데오는 도자로 초현실적인 인물 형상을 빚는 작가로 소개된다. 일본화, 공예, 조소를 모두 전공한 그는 이 모두를 혼융해 코믹하면서도 상상력을 유도하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과 다양한 사물을 결합한 융합 작품이다.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면 선禪의 철학이 큰 줄기로 자리한다. 존재의 부정과 비움이 메인 주제지만 크게 보면 우주를 일원론으로 보는 스케일이 큰 작가이다.

선禪은 일절 조작하지 않는다. 중심을 이루려거나 권력을 쥔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으로 해석된 모든 이원론을 폐기하고 전체를 유기체로 보는 장자의 제물론이다. 즉 만물을 대등하게 보려는 사상이다.

작가 스스로도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무아몽중無我夢中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함으로써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그만의 사유방식으로 작품을 다룬다고 한 것처럼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사상으로 사물을 본다는 의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신화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만물의 유래와 기원 등, 자연철학에 포커스를 두고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그릇된 욕망의 세계의 이원론을 폐기한 무중심적 선사상이다.

도자 흰 바탕에 나뭇잎과 꽃 등 여러 자연물이 유동적으로 접속하며 리좀(rhizome)처럼 연결돼 있다. 팔과 다리는 불끈 솟는 힘줄 같기도 하고 자연의 무늬를 채록한 듯, 마치 자연과 인간의 존재 근원을 하나로 묻는 이를테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계 맺기 코드이다. 없음에서 있음 찾기, 익숙함에서 새로움 찾기, 낯 섬 창조하기로 인간 내 조명되지 않은 자연성의 발현이다. 얼굴에 상을 만들지 않는 작가의 중심 의도는 인간중심의 해석 체계 전복일 것이다.

텅 빔을 제시하지만, 결코 공명 상태는 아니다. 둥근 구멍의 얼굴은 그 원형인 하늘, 태양, 달과 같이 우주를 상징한 듯하고 조명되지 않는 비존재를 무한대로 열어놓은 것 같아 오히려 광활한 우주를 읽는 시간이다.

텅 비어 있는 얼굴에는 욕망이나 명예, 권력이 근접할 리 만무하다.`도는 두루두루 사랑하고 길러주지만, 결코 군림하지 않는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 오랫동안 철학의 큰 주제처럼 가슴에 파동을 일으킨다. 진리와 비진리로 구분한 이제까지의 그 모든 폭력성을 폐기하고 텅 비어 있음의 상태로 큰 세계를 선보인 다카시마 히데오,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여기저기 뒤적거려 보는 동안 다시금 무상과 무념의 선사상에 침잠한 시간이다.

무아, 내가 아닌 내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일체의 욕망과 사회적 가면을 벗어 치운 내 본래의 얼굴이 궁금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본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 몸인가, 정신인가. `나'라고 하는 순간, 상이 만들어지고 그 상에 갇혀 부자유한 생을 사는 사각 벽 속 내가 있다. 지금 여기, 저 텅 빈 비존재를 읽는 동안은 그나마 내가 건강한 자연성을 회복해 가는 시간이다.

산다는 것은 텅 빔의 반경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라고 규정한 상 하나를 비운 만큼 영혼의 자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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