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리관
죽리관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3.10.2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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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시와 그림은 별개의 분야 같지만, 간혹은 하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송(宋)의 대문호였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유명한 평어(評語)를 남겼는데, 그 주인공은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였다. 그의 말대로 왕유의 시 속에는 과연 그림이 있는 것일까?


죽리관(竹里館)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인적 없는 대숲에 홀로 앉아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금을 타며 길게 흥얼거리네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깊은 숲인지라 사람은 알지 못하는데
明月來相照(명월미상조) 밝은 달이 와서는 아는 체하네

시인은 여느 사람처럼 젊은 날을 세속적으로 살다가 나이 사십 무렵에 홀면 속세를 떠나 망천(輞川)이라 불리는 한적한 곳에 은거하던 중이었다. 그곳엔 죽리관이라는 대 숲 속 정자가 있었다.

해질 무렵 이곳을 지나던 시인은 무슨 연유에선지 갑자기 감흥이 일어났다. 그곳은 시인 말고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깊은 대나무 숲이었지만, 시인의 감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인은 곁에 있던 금(琴)을 집어 능숙하게 현을 켜는가 하면 또한 길게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자신의 취한 흥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능숙한 연주와 노래가 어우러진 공연에 관객이 없을 수는 없지 않은가? 깊은 숲인지라 어차피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관객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의외로 관객은 하늘에서 나타났다. 흥에 취해 밤이 된 것도 몰랐던 시인에게 환한 빛을 비추며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달이었다.

어두운 채색의 대나무 숲, 역동적인 시인의 금 연주 모습 그리고 어둠을 쫓은 밝은 달은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혹자는 깊은 산 속에 홀로 사는 모습은 전혀 시적이거나 회화적이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깊은 산 속에 혼자 사는 모습은 투박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러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정신세계는 감히 세속의 자로 재어질 수 없다. 비록 관념 속에서 금을 타고 노래를 읊조릴지라도, 그 내면의 풍요로움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으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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