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초점 시대와 공감의 원심력
다초점 시대와 공감의 원심력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3.10.1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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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나와 다른 의견에 “아하, 그렇구나!”하고 다초점 공감력을 키우는데 독서만 한 것은 없다. 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독서가 인류의 보편적 행위로 발전한 이유는 그 비용보다 이득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피력한다.

뇌에 파동을 일으키는 독서야말로 문명사회의 쾌속 엔진이며 동력인 까닭이다.

광차실험, 트롤리 딜레마는 현대 덕 윤리학에 큰 공헌을 한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루스 풋이 최초로 제시한 사례 중 하나이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라는 추상개념을 이해 돕는 과정에서 든 익숙한 논제이다.

짐을 실은 고장 난 트롤리가 선로를 달린다.

원래 궤도로 직진하면 다섯 명이 죽고 비상 궤도로 우회하면 한 사람이 죽는다.

선로를 변경하면 다섯 명은 살지만, 다른 한 명은 죽는다. 만약 당신이 선로 전환기 옆에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공동체의 공리와 윤리 중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이냐의 문제이다.

이번엔 트롤리가 하나뿐인 선로를 달린다. 여전히 선로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선로 위 육교에는 덩치 큰 남성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다. 당신이 그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면 그 무게로 트롤리는 멈추고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를 묻는 도덕 심리학의 문제이다. 레버 당김의 첫 사례는 90%가 허용했고 뚱뚱한 사람을 밀치는 두 번째 사례는 10%만이 허용했다. 이 문제는 개인을 수단으로 삼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트롤리 딜레마는 토론 문제의 단골 주제이다. 해마다 학교에서 수업 중 이 논제를 다룬다. 학생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에 입각한 판단을 내리지만, 두 번째 사례를 통해서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면서 윤리 문제에 부딪힌다.

두 갈래 기로라는 불가피한 상황과 개인을 수단으로 보는 살인 개입 문제인데 만약 최대 다수의 행복이 목적이라면 범법자 다섯 명과 도덕 시민 한 명일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의견도 분분하다.

자신이 그곳에 있다면 선로 전환기의 레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덩치 큰 사람도 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사는 곳곳엔 이런 유사한 일들이 어마어마한데 동일률로 다 적용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결과를 내는 건 아니지만 공동체가 세운 규칙을 따르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기에 도덕 일반이라는 그 엔진이 이 사회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내집단 중심의 공감 과잉을 내려놓고 역지사지하는 인지적 공감이 절실한 시대이다.

이제는 공감의 깊이라는 구심력에서 공감의 넓이라는 원심력으로 그 반경을 넓힘으로 내집단과 외집단, 자 집단과 타 집단을 구분하는 편향된 사고를 깨고 다양한 세계를 볼 줄 아는 다초점 사고가 필요하다.

고난이 많은 집단일수록 엄격한 규범을 만들고 창의적인 사회일수록 느슨한 규범을 만든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경쟁 위주로 달려온 교육의 현주소와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이 추론되는 부분이다.

요즘 정치권의 양태를 보면 넝마 도덕의 정점을 찍는다. 건강한 의견 개진과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태도가 위험 수위를 넘는다.

다초점을 받아들이는 안목과 그 공감 능력을 키우는 일에 독서야말로 최상의 벗이다. 내집단 중심의 사고의 편향을 깨며 세계 내 존재하는 것들과 소통하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가장 큰 쾌속 엔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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