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시로 성장 … 4인의 업적 재조명
교육도시로 성장 … 4인의 업적 재조명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10.04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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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⑩ 청주교육에 씨앗이 된 인물들
청석학원 설립자 청암 김원근·석정 김영근 형제
1924년 대성보통학교 출범... 백년지대계 출발점
밀러 선교사 계몽교육 앞장... 청주 미션스쿨 설립
강기용 선생 운호학원 설립... 여성 교육시대 기틀
청석학원이 시발점이 된 대성보통학교 1회 졸업식(1926).
청석학원이 시발점이 된 대성보통학교 1회 졸업식(1926).
청암 김원근·석정 김영근 선생, 밀러 선교사, 강기용 선생
청암 김원근·석정 김영근 선생, 밀러 선교사, 강기용 선생
신라여중 현판, 신라여중 초창기 모습(1954).
신라여중 현판, 신라여중 초창기 모습(1954).

시민 교육의 불모지였던 조선말, 이 땅에 근대교육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건 강대국들의 침략을 지켜본 선각자들과 서양선교사들의 계몽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 신교육을 접한 지식인들은 주권을 잃은 나라를 되찾고자 시민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학교 설립에 적극 나섰다. 또한 기독교는 시민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며 학교를 세우고 선교활동과 계몽교육으로 입지를 넓혔다.

새로운 시대 전환 속에서 청주 역시 1900년 이후 본격적인 근대학교 교육이 시작된다.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학교 설립에 나섰고, 미국의 밀러 선교사는 40여 년 청주에 거주하며 교육을 통해 선교와 계몽운동을 펼쳤다. 청주가 교육의 불모지에서 교육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주교육에 씨앗이 된 네 분의 업적도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



# 백년지대계를 이룬 청석학원 설립자, 청암·석정 선생

청주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면 청암 김원근(1886-1965)과 석정 김영근(1888-1976) 형제다. 청주대학교 설립자인 형제는 1924년 육영사업에 뛰어든 후 청주교육의 100년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북출신인 청암과 석정은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9살과 7살에 고향을 떠나 청주에 자리 잡는다.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청주 장터에서 행상하다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조치원에 `김원근상회'를 창업한다. 교통요지였던 조치원은 전국의 농산물집산지가 되면서 사업도 번창해 큰 부를 얻는다. 거상이 된 형제는 자선 활동으로 어려움에 처한 지역민을 도왔다. 또한 상업 실무를 가르치기 위해 연청학원 설립(1917)을 시작으로 부인여학 설립 기부(1921)와 청주공립보통학교 대강당(1923·현 주성교육박물관) 신축자금을 기부하는 등 교육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청암은 사업을 하면서 직원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이 학교설립이라는 육영사업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부족한 학교시설로 배울 곳 없는 현실을 자각한 청암은 보통학교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학급 증설을 요청했지만 일본 총독부의 불가로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이때 경영난에 시달리던 대성학원의 인수제의를 받아들이며 1924년 대성보통학교로 출범시킨다. 교육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청암은 직접 학교를 설립하고 거액의 사재를 들여 학생들을 무상으로 교육했다. 대성보통학교는 지금의 청석학원 뿌리라는 점에서 백년지대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후 청암과 석정 형제는 상업학교 설립에 의견을 모으고 1935년 청주상업학교를 개교한다. 1947년에는 대한민국 광복 1호로 설립 인가된 4년제 청주상과대학(현 청주대)이 탄생하면서 청석학원의 탄탄한 기반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남다른 교육철학으로 민족혼을 보여준 청암과 석정 선생. 오랜 세월에도 청석학원이 청주교육의 맥을 이을 수 있었던 힘은 지역과 함께 했던 형제분들의 시대정신이 아닐까.



# 청주 미션스쿨의 대부,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

조선말, 서양 기독교도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에 발을 내딛는다. 외국문화에 폐쇄적이었던 조선에서 선교사들은 선교활동 외에도 계몽교육에 앞장선다. 청주에 미션스쿨이 설립된 것도 이때다. 1892년 한국으로 파견 온 미국의 북 장로교 소속 선교사 프레드릭 밀러(민로아·1866-1937)가 1904년 청주로 이주해 온다. 밀러는 청주에서 교회를 세울 부지를 사들이고 청주제일교회(기존 청주읍교회)를 설립했다.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그는 교육을 통한 복음전도를 위해 청남학교(현 청남초등학교)를 설립한다. 지역민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교육열을 확인한 밀러 선교사는 청주를 중심으로 총 6개 학교를 세워 미션스쿨을 이룬다.

교세가 확장되자 밀러 선교사는 탑동에 선교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양관'건물 6채를 짓는다. 1906년부터 1932년까지 붉은 벽돌로 지은 양관은 미션스쿨인 청주 일신여중·고 교정에 남아있다. 정년퇴임 한 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은 밀러는 선교사로의 업적뿐만이 아니라 청주교육을 꽃피운 교육자로도 평가돼야 할 것이다.



# 여성 교육시대를 연 운호학원설립자, 강기용 선생

해방 후 교육열이 높아졌지만 여성들에게 학교 교육은 꿈같은 일이었다. 청주도 여자중학교 신설이 시급했지만 여성들의 중등교육에 관심 있는 육영사업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구보다 여성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강기용(1917-1978) 선생이 육영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1954년 재단법인 신라학원을 설립하면서다.

평안남도 출신인 강기용 선생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양계, 양돈, 어물상하며 모은 돈으로 대학 설립에 나선다. 우선적으로 여성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신라대학'을 설립한다. 당시 충청북도 경찰국과 경찰학교로 사용되던 건물과 토지를 사용임대차 계약을 체결했지만 재단설립과 대학 설립인가 신청 서류가 세번이나 반려되면서 대학설립은 뒤로 미뤄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생은 여자중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신라여자 중학교 설립에 나선다. 설립인가 신청을 거듭한 끝에 1954년 7월 운호학원의 전신인 `신라학원'의 설립이 인가됐다. 이에 신라학원은 옛 경찰학교 건물을 임대해 사무실로 사용했고 신라여자중학교를 개교했다. 1958년 3월에는 신라여자상업고등학교를 개교하고, 1967년에는 청주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며 청주지역의 여성고등교육에 큰 물길을 만들었다.

여성인재 양성에 힘썼던 강기용 선생의 교육철학은 초기`신라'라는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청주지역의 여성교육을 담당하던 신라학원은 1960년 교사를 지금은 모충동 서원학원자리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교육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끝>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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