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과 악수
포옹과 악수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23.09.1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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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씨앗 한 톨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신경이 쓰였지만, 예약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자리에 기대고는 뒷머리가 눌려지는 것을 염려하며 눈을 붙였다가 몇 번 떴더니 목적지였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지하철 3호선의 노선도를 확인했다. 안국역(安國驛)에서 내릴 땐 태평성세(太平聖歲)를 원했다. 창덕궁 방향 3번 출구에선 무려 37년 만에 얼굴을 보는 군대 동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뜨겁게 포옹했다.

북촌의 계동길을 걷다가 점심을 먹으러 밥집을 찾았다. 대기자 명단에 친구가 `정매화(正梅花)'라는 별칭을 쓰기에 연유를 물었더니,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시구를 좋아해서 그렇다고 했다. 애호박찌개가 나오자 영세명이 아브라함인 친구가 내게 식사 기도를 권했다. 먹는 우리에게 새 힘을 달라고 진심을 다해 짧게 기도했다. 둘 다 밥그릇을 발우공양(鉢盂供養)처럼 깨끗이 비웠다.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오미자차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들도 나왔다. 그 집의 가운데뜰에선 햇살이 꽃밭 쪽으로 따사롭게 내비치고 있었다. 청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남아서 헌법재판소의 백송(白松)도 보고, 경복궁의 뜰도 걸었다.

강대헌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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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터미널까지 친구가 동행을 해 주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 굳센 악수를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친구가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의 7시간 가까이 나와 함께하며 극진히 대접하는 친구를 보면서,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주는 `서(恕)'의 태도를 배웠다.

도착해서 발을 디디고 고개를 드니, 청주의 밤공기가 서울로 맞닿아 있었다.

누군가를 환대(歡待)하는 것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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