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바쳐 싸운 의인들 정신 `고스란히'
목숨 바쳐 싸운 의인들 정신 `고스란히'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9.0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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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⑦ 독립운동가 교육구국운동 `문동학교·덕신학교'
日 조선 침탈에 충북 출신 신지식인 교육운동 앞장
고령 신씨·하동 정씨 문중학교 설립 민족의식 일깨워
신규식·정순만 선생 지역 청년들에 교육 중요성 강조
고령 신씨 문중에서 설립한 문동학교 터(가덕면 인차리 신영호 고가).
고령 신씨 문중에서 설립한 문동학교 터(가덕면 인차리 신영호 고가).
하동 정씨 문중에서 설립한 옥산 덕신학교.
하동 정씨 문중에서 설립한 옥산 덕신학교.

 

한국 역사에서 조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바쳐 싸운 의인들이 있었다. 19세기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일본이 조선을 삼킬 때도 힘없는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를 일으켰고, 조국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자 지식인들은 국민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한다.

충북 출신의 많은 독립운동가 역시 교육구국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지역에 신교육을 담당할 학교를 설립한다. 특히 청주는 마을학교 개념의 서당을 문중학교로 유입시키며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가덕면의 고령 신씨(산동 신씨) 문중과 옥산면의 하동 정씨 문중을 꼽을 수 있다. 두 가문은 고향에 문중학교를 설립해 지역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엄혹한 국내 현실을 누구보다 먼저 자각한 개화기 지식인들은 그렇게 독립운동의 하나로 교육구국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교육을 통해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던 문중학교도 100년 역사를 훌쩍 넘었다. 조국 독립에 헌신하며 교육구국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은 미약하나마 문동학교(文東學校)란 이름으로 고향인 가덕면에 남아있다. 한적한 시골마을 인차리에는 고령 신씨 문중에서 설립해 신학문을 교육하던 문동학원이 있다. 지금은 신영호 고가로 명명된 이곳이 바로 문동학교 터다.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의 생가로도 알려진 이 고가는 육군무관학교를 다니던 그가 1901년 신병치료차 고향집에 머물면서 사랑채를 고쳐 문동학교와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립해 근대교육을 가르쳤다.

(왼쪽부터)상해 망명 당시 신채호·신석우·신규식, 신규식 휘호 교육구국.
(왼쪽부터)상해 망명 당시 신채호·신석우·신규식, 신규식 휘호 교육구국.
신규식과 상해 박달학원, 문동학교 진급증서.
신규식과 상해 박달학원, 문동학교 진급증서.

하지만 정확한 학교 설립 기록이 없어 학계에선 고령 신씨 문중이 설립한 영천학계(靈川學契)에 주목하고 있다. 신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신규식은 1908년 5월 재경 고령 신씨들과 영천학계를 조직한다. 영천학계 설립 취지문에는 “국가의 치란과 존망, 민족의 문명과 야만 및 성쇠가 교육의 흥폐에 있다”고 밝히며 신·구 학문 간의 조화를 통한 국민 의무교육 시행을 강조했다. 이처럼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한 고령 신씨 문중은 종중의 전답과 재정을 투입해 학교를 설립한다. 1908년 7월 신승구 등 문중 인사들이 인차리에 문동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1909년 인가를 받았다. 당시 문동학교는 4년제로 교사 2명, 학생은 48명이었는데 국어, 역사, 산술 등 13개 과목을 가르쳤다.

하지만 문동학교는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교된다. 이후 신규식의 형 신정식이 문동학교의 교명을 바꿔 1914년 덕남사숙(德南私塾)을 개교하고 문중 자녀를 위한 계몽교육을 담당한다. 문동학교가 구국운동에 방점을 찍고 민족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했다면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던 시기에 개교한 덕남사숙은 계몽교육에 힘썼다.

누구보다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선 신규식 선생은 1909년 3월 중동야학교(中東夜學校) 제3대 교장으로도 취임한다. 당시 애국계몽단체나 민간인들이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각성해 설립한 많은 사립학교 중 하나로 1906년 한어야학(漢語夜學)에서 출발한 학교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은 1912년 12월17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내 명덕리(明德里)에 박달학원(배달학원)을 개설해 상해로 모여드는 청년들을 교육했다. 당시 박달학원 선생으로는 박은식·신채호·홍명희 등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해 있어 활발한 교육운동이 전개됐음을 엿볼 수 있다.

문동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옥산 덕신학교가 설립된다. 덕신학교는 옥산 덕촌리 하동 정씨 문중에서 설립해 운영했던 곳으로 2016년 복원돼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1906년에 설립된 덕신학교는 정씨 종중에서 재산을 희사해 이듬해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학교 설립에는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이 제안했지만 망명길에 오르면서 문중과 덕촌교회에서 운영을 맡아 신학문 교육을 담당했다.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은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그곳에서 이상설 선생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독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을 병행했다. 현재 덕촌리 마을은 독립운동마을로 지정돼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잇고 있고, 복원된 덕신학교는 전통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청주지역 문중이 신교육을 담당하는 주체가 되면서 문중학교는 가문의 자제들과 지역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비록 학교의 맥이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서 근대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격변을 교육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구국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연지민기자

annay2@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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