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구비 찬가
이목구비 찬가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3.08.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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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이목구비(耳目口鼻)는 귀·눈·입·코를 이르는 한자어입니다. 얼굴 생김새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지요.

신체구조 중에서 타인의 눈에 가장 잘 띄고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신원확인이 가능한 기관이 바로 이목구비입니다. 듣는 귀, 보는 눈, 먹고 말하는 입, 냄새 맡고 호흡하는 코 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우리말 가나다순이라 신묘하기 그지없습니다.

듣고 보는 한 가지 소임만 하는 귀와 눈은 두 개씩 주고, 먹고 말하고 냄새 맡고 호흡하는 다기능을 하는 입과 코는 하나만 주신 조물주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입니다. 먹고 말하고 냄새 맡고 호흡하는 것보다 듣고 보는 것을 더 많이 하고 더 잘하라는 계시입니다. 두 귀와 두 눈으로 잘 듣고 잘 보고 기민하게 대처하는 개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먹잇감이 되고 마는 약육강식의 야생생태계가 이를 웅변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맡은 소임보다 생김새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려하면 속된 말로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잘 생긴 귀일지라도 듣지 못하면 귀머거리고, 아무리 잘 생긴 눈일지라도 보지 못하면 장님이고, 아무리 잘 생긴 코일지라도 냄새 맡지 못하면 헛코이고, 아무리 잘 생긴 입일지라도 말하지 못하면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반대로 잘생기고 기능이 뛰어날지라도 맡은 소임을 올바로 하지 않고 허투루 하면 화를 부르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또는 운수 사나워 듣지 말아야 할 것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 보고, 하지 말아 할 말을 하고, 맡지 말아야 할 냄새를 맡을 때가 있습니다. 실수로 똥 밟았다 여기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생채기가 자못 큽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저마다 이목구비를 통해 세상과 인간과 소통하며 익어갑니다. 하여 70고개를 무사히 넘을 수 있게 해준 귀와 눈과 입과 코에게 때늦은 감사와 통회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먼저 이목구비를 모나지 않게 성하게 물려주신 부모님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귀 눈 입 코 모두 원활하게 작동해 사는데 알파가 되었으니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좋아하는 음악과 새들의 지저귐과 선후배들의 덕담과 아들과 손주들의 귀여운 옹알이를 듣고 살았으니 귀 호강도 많이 했음입니다.

또 세계 유명 관광지와 명승지를 돌아보고, 철 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미인들도 곁눈질하고, 아들 손주들이 커가는 모습도 바라보고, 여명과 노을과 밤하늘의 별과 뭉게구름과 무지개도 보고 살았으니 눈 호강도 했음입니다.

사랑의 말을 건네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도 하고, 강단과 연회에서 개똥철학도 폈으니 입 호강도 했음입니다. 꽃향기도 맡고, 아이들 살 냄새도 맡고, 돈 냄새도 맡고, 하늘 냄새도 맡았으니 코 호강도 했음입니다.

키도 작고 가난했지만 밉지 않은 이목구비 덕에 착한 아내와 결혼해 일가를 이룰 수 있었고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밉상 받치지 않고 살았으니 축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아직 보청기와 안경 신세를 지지 않고 있고, 기억력이 떨어져 말이 끊길 때가 있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고,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입보다도 귀를 윗자리에 앉혀라'란 탈무드의 경구와 귀와 눈과 코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지만 입은 통제할 수 있다는 톨스토이 말을 가슴에 새깁니다. 들리는 걸, 보이는 걸, 냄새 나는 걸 통제할 수 없지만 먹고 말하는 입만은 자중자애하며 살리라 다짐합니다.

이목구비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넘나드는 창구입니다. 선과 악, 진짜와 가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날마다 닦고, 조이고, 쇄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흉화가 지고 길복이 핍니다.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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