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어떤 날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23.07.0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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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씨앗 한 톨
해거름의 접시꽃.
해거름의 접시꽃.

 

어떤 날이 짭짤한 하루가 될 때가 있다. 그날에 약속과 함께 정해져 있던 일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예견치 못했던 다른 일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어지는 날로 기분까지 어절씨구 좋아지는 경우였다.

비슷한 연배의 직장 동료가 뜬금없이 여름 휴가 때 외씨버선길을 걷자고 말을 건넸다. 둘이 걷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느냐는 물음으로 대답을 미루고는 숨을 돌렸다.

정시에 퇴근한 내가 포상처럼 받은 것은 천도복숭아였다. 해마다 과일 타령할 때면 애타게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드디어 맛을 보았다.

그래도 기운이 나지 않아 약속을 물리치고는 저녁을 먹기 전에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마음을 다졌다. 속도를 내지 않고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살폈다. 하지(夏至) 다음날의 해거름은 꼬리가 길면서도 구름띠와 어울려 신비로웠다. 개망초와 금계국의 무리는 외롭지 않았고, 활짝 핀 무궁화를 보면서는 그것의 숭고한 낙화를 떠올렸다. 접시꽃의 붉은 자태는 역광으로 찍어 스마트폰에 담았다. 징검다리 놓인 개울을 건너다가는 떼를 지어 헤엄치는 어린 물고기들을 잠깐 구경했다. 마침 바람도 시원해서 덜 지쳤다.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샤워를 하고는 아파트 텃밭에서 따온 상추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밥상이 부럽지 않았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란 TV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보기 서비스로 어드벤처 장르의 영화를 보듯이 감상했는데, 의기소침해진 선수들에게 “져도 괜찮으니, 게임을 즐겨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던 FC 월드클라쓰의 감독이 고마웠다. 그러고는 밤 12시 전에 곱게 잠들었다. 미리 정해지지 않았던 일들이 꼬리를 물면서 폭죽처럼 터지는 어떤 날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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