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성본리 유적으로 본 음성군의 인구 변화
음성 성본리 유적으로 본 음성군의 인구 변화
  • 김효진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23.06.0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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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문화유산의 이야기
김효진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김효진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음성의 서쪽지역인 성본리에 음성군에서 추진한 성본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에 지난 2019년에는 산업단지 조성 이전에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그 중 조선시대에 관련된 유구가 전체 477기 중에 주거지는 217기가 확인되었다. 음성 성본리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대부분의 평면형태가 방형이며, 취사난방시설이 확인된 수혈주거지와 확인되지 않은 무시설식 수혈주거지가 모두 확인되었다.

이들 수혈주거지 내부에서는 도기류와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류, 기와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출토된 유물을 기준으로 볼 때 14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폭넓은 시기에 수혈주거지가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수의 수혈주거지가 확인 것과 같이 토광묘의 수도 68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능선의 사면을 따라 고루 분포하며, 청자에서부터 분청사기, 백자에 이르기까지 함께 부장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기준으로 볼 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유물들로 백자의 경우는 지방백자가마에서 대량생산된 백자로 확인되었다.

이같이 조사된 내용을 토대로 이 시기의 음성군을 살펴보면,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의 건국부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시기로 조선시대의 초중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기에 음성은 고려시대 지방제도와 같이 충주목에 속한 4속현(양춘·제천·음성·연풍)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음성군의 인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참고할 만한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다.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제천에 이르기까지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에 이르기까지 17리, 남쪽으로 청안에 이르기까지 26리, 북쪽으로 충주석적산에 이르기까지 19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구는 171호에 72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이 33명, 선군(船軍)이 46명 규모였다'라고 하였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음성 지방은 4면 19리, 1828호, 8502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30년이 지난 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2개 리가 증가한 21개 리로 기록되었으나 인구는 6,951명으로 현저하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음성군은 조선시대에 1만여 명의 인구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고, 음성 성본리에서 확인된 주거지로 보았을 때 결코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늘날 음성군은 9만여 명으로 충북의 진천군, 증평군, 단양군,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이에 음성군에서는 인구 15만을 유치하여 음성시의 승격을 계획하고 있다.

음성군에서 인구유입과 정주·생활 인프라 구축 등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발전하여 `음성시'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루기를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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