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낮잠
초여름 낮잠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3.05.22 2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오월 하순이 되면, 산과 들에는 짙어질 대로 짙어진 녹음이 자리를 잡고, 꽃이 진 자리에 이른 열매를 맺는 나무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덧 한 해의 거의 절반이 지나가버린 초여름이 된 것이다.

이 즈음은 본격적인 여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름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풍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러한 여름 분위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른한 몸을 달래 주는 낮잠이다. 송(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도 어느 초여름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날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 농익은 여름 풍광을 마주하게 되었다.


초여름 낮잠(初夏睡起)

​梅子流酸濺齒牙(매자유산천치아) 매실의 신 물 이빨 사이로 터지고
芭蕉分綠上窗紗(파초분록상창사) 파초는 녹색을 나누어 창문 비단 휘장에 올랐네
日長睡起無情思(일장수기무정사) 해 긴 날 낮잠 자다 깨니 아무 생각 없는데
閑看兒童捉柳花(한간아동착류화) 아이들 버들 솜 줍는 것을 한가롭게 바라보네


매화는 꽃도 이르지만 열매도 이르다.

초여름에 이미 가을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매실 아니던가?

그것을 씹으면 시큼한 맛이 나는 즙이 이 사이로 터져 나온다.

아직은 덜 익은 초여름의 맛이다.

그런가 하면 파초는 잎이 커질 대로 커져서 그 파란 빛이 반쯤은 창문 휘장에 드리워진다.

매실의 시큼한 맛을 떠올리고 창문 비단 휘장에 드리운 파초 그림자를 보고 싱그러운 녹음을 느낀 시인은 나른함에 겨워 달콤한 낮잠에 빠지고 말았다.

낮잠에서 깨어난 시인은 멍한 상태로 한동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두리번거리던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떨어져 날리는 버들 솜을 좇는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었다.

초여름이면 이미 한 해가 무르익는다.

겨울 지나고 봄인가 했더니 또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짙어진 녹음을 찾아 더위를 피하고 일찍 열매를 맺은 매실의 시큼한 맛을 즐기며 여유롭게 보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지혜가 아닐까?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