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하게 지켜봐 주는 나무 - 목단
묵묵하게 지켜봐 주는 나무 - 목단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5.09 2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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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공예진흥팀장

 

세차게 몰아치던 빗줄기는 언제 그랬나 싶게 숨이 멎었다. 무더운 여름, 차양구조물에 설치된 열을 식혀주는 설비에서 뿜어내는 미스트보다 더 부드러운 안개다. 그러다 별안간 빗방울이 굵어졌다. 거기에 바람까지 거세게 휘몰아치니 그 무엇이 감당하리? 만무할 일이다. 좀 더 가까이하고 싶은데 곁에 있고 싶은데, 기어이 마지막 꽃잎을 떨구게 하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 꽃잎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의 멈춤도 없이 이리저리 비바람은 자리를 옮기고 있다. 아쉽단 생각보다 세차게 몰아친 비바람이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줄기는 오래되었어도 몸집을 키우지 않았다. 거친 갈필(葛筆)을 회백색의 분청토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한참을 골몰하던가 싶더니 붓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굵은 획을 긋는다. 그리고 잠시 붓의 방향을 틀어 다시 올려친다. 그리고 몇 번의 획을 더 치는 사이, 처음 그었던 획의 분청토는 건조가 되면서 터진다. 그리고 세월을 머금고 회갈색으로, 회갈색은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끝내는 검갈 색으로 변한 분청토를 모조리 벗어버린다. 뽀얗고 반질반질한 아이보리색의 태토가 속을 드러낸다.

깡마른 거친 줄기다. 신록이 한창 봄을 즐기는데 물을 올린 티를 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죽은 가지인 듯하다. 죽어 삭정이가 되고 메마른 줄기라 해도 이만할까? 수십 년 동안 매년 봄을 맞았는데 애써 태를 내지 않는다.

분청토의 획이 끝나는 지점에 검붉은 한 점을 찍었다. 그리고 점은 불의 기운을 받는다. 며칠 동안 지속되는 불의 기운을 받아 점은 넓은 몸짓을 한다. 느리지만 커다란 몸짓이다. 굵은 양모필에 진사를 흠뻑 적신다. 그리고 붓을 옆으로 뉘어 힘 있게 면 처리다. 붓촉 끝의 진사는 진하고 필관에 가까운 부분은 옅은 색이다. 진사의 안료가 불을 만나 깊은 색의 꽃을 피웠다.

진사의 깊은 색은 더없는 색을 지녔다. 그윽한 향은 그 어느 꽃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생경함이다. 뒤꼍으로 난 길을 지나는 길에, 왜? 이 길을 가게 되었는지 잊게 한다. 걸음을 멈추었고 몸은 가던 길을 향했다가 다시 꽃술을 향해 몸을 튼다. 그리고 가슴이 미어진다.

하염없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깡마르고 거친, 죽은 가지인 듯한 메마른 가지 끝에 피워낸 꽃은, 꽃잎은 한없이 크고 깊다. 말없이 묵묵하게 일에 빠져 있던, 삐쩍 마른 체구에 힘들다 한 번 내색하지 않았지만, 늘 커다란 행복을 주었다. 좀 더 오래 꽃을 피운다면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으련만, 심술궂은 빗줄기는 꽃잎을 떨구었다.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꽃잎을 떨군 자리에, 노란 꽃술도 흔적을 지운 가지 끝에 다섯 개의 씨앗 주머니가 달렸다. 가운데에 세 개의 작은 주머니를 둘러싼 왕관의 모습을 가졌다. 씨앗 주머니에는 세필의 끝에 진사와 청화안료를 살짝 찍어 넣었다.

수십 번의 봄을 맞이하며, 한 번도 꽃 피우는 것을 잊은 적 없다. 그러면서 가지는 더 단단해지고 기품을 더했다. 다른 나무였다면 아름드리가 되었을 법한데, 겸허했고 자제했다. 나이테나 있을까? 그렇다고, 웬만한 힘을 가해도 부러질 일 없다. 어지간한 바람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약간의 요지부동이 있을지언정 절대 부러질 일이 없는 나무다. 그 나무의 씨앗에서 발아된 싹은 어느덧 굵은 가지가 되어간다.

집을 나서며 늘 인사를 건넨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담장이 없는 집의 대문을 나서며 목적지를 향하며 늘 인사를 건넨다. 꽃을 피웠을 때는 가까이서 얼굴을 들이밀고, 꽃이 지고 씨앗주머니를 키울 때부터 다음 봄이 올 때까지는, 나고들 때마다 인사를 건넨다. 내 아버지가 심고, 애지중지하던 나무, 목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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