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거리, 음성역
숲거리, 음성역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5.0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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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아궁이 앞에 앉은 어머니의 눈은 연신 가마솥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아니 물을 끓이는 가마솥과 밥을 안친 가마솥 사이에 있는 오빠의 운동화를 지킨다고 해야 맞다. 첫 기차를 타고 학교 가는 큰 아들의 발이 얼까 어머니는 새벽이면 부뚜막에 오빠의 신발을 올려놓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오빠는 증평에 있는 공고를 다녔는데 언제나 기차역까지 따라가 배웅을 하셨다. 또한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기차역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깜깜한 밤 혼자 걷는 길이 무서울까 싶어 논둑길도 마다 않고 그렇게 마중을 나가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가슴팍에 사과 한 알을 품고 계셨다. 큰오빠는 사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와삭, 와삭' 사과를 베어 먹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음성역이 지금은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의 평곡리에 있지만, 예전에는 숲거리라고 불리던 오성동에 있었다. 지금의 음성경찰서 자리이다. 음성읍지(陰城邑誌)에는 음성역이 숲거리에 들어선 일화가 실려 있다. 음성역이 들어선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 12월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기차역이 마을 가까이에 들어서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산맥을 끊어 지덕(地德)이 손상되고 인물이 나지 않으며, 또한 왜놈이 쉽게 들어 올 것이며, 철로 주변에 살면 화를 입을 것이며, 조상의 묘가 파여 집안이 망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철도주식회사는 음성역 또한 처음에는 외곽의 직선 공사로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음성의 유지들이 지역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역사 이전 운동을 했다고 한다. 조선철도주식회사는 이 소식을 듣고 두 군데의 철교를 놓아야 하는 큰 공사지만 흔쾌히 음성사람들의 뜻을 받아 주어 음성역이 시내인 숲거리에 들어서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숲거리에 자리했던 음성역이 평곡리로 이전을 한 것은 1980년이었다. 음성을 지나가는 기차는 충북선으로 사람을 태우는 열차보다 화물 열차가 많아 복선화가 되면서 좀 더 넓은 역사가 들어 설 수 있는 평곡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오빠가 증평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1970년대였으니 그때는 기차역이 오성동 숲거리에 있었다. 어느 날엔가 나도 어머니를 따라 작은 기차역에서 오빠를 마중했던 때가 있었다. 오빠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얼마나 아련하던지 철모르던 그때 나는 오빠가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비가 온 끝이라 그랬을까. 기차역은 안개로 분위기도 스산했다. 아직 겨울이 오기 전이었으나 늦가을이라 그랬는지 춥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저 멀리 `뿌우~' 소리가 들려오자 어머니의 얼굴이 얼마나 환해지던지, 천천히 멈추고 있던 기차를 향해 나도 덩달아 목을 길게 빼고 오빠를 찾기 바빴다. 그때 우리 집은 동네에서 외떨어진 산 너머 과수원집이었다. 오빠가 남자이긴 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그때, 혼자 깜깜한 밤에 논둑길을 걸어 산을 넘어 오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왼 종일 품팔이를 하고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아들을 마중 나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아삼아삼하다.

오빠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언니와 나를 딸이 아닌, 개울건너 아주머니와 고마운 아주머니로 어느 순간 바꿔 놓으셨다. 하지만 숨이 멎는 그 순간 까지도 오빠는 여전히 당신의 아들로 남아 가슴에 품고 떠나셨다.

가끔씩 찾는 음성역,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사과 한 알을 가슴에 품고 아들을 기다리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려오곤 한다. 요양원 창가에 앉아 주름진 이마가 까맣게 타도록 하루 종일 아들만 기다리시던 어머니, 오늘처럼 캄캄함 밤이면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더 그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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