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고 마디다 - 참나무
더디고 마디다 - 참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4.2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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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누렇고 짙은 가랑잎 사이로 가녀린 세 갈래의 초록이 존재를 드러낸다. 분명 작년에 떨어진 밤을 제대로 줍지 못했을 터, 외로이 겨울을 이겨낸 밤이 싹을 틔운 것이겠거니 무심코 지나가기를 바랐건만, 기어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렸다.

엄지손가락만 한 너비의 잎은 잎맥이 마주나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햇빛을 받고 있었다. 어리지만 잎의 가장자리로 가시의 돌출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분명 밤나무가 아니다. 검지와 중지를 모아 가랑잎을 헤집고 조심스럽게 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도토리의 싹이었다.

가랑잎 밑으로는 두엄이 쌓여 있고, 그 옆으로는 애벌레가 웅크리고 미동도 없다. 속의 내장이 훤히 보이고, 털 가시가 삐쭉 삐죽 난 장수풍뎅이 애벌레 옆으로 둥그런 도토리가 싹을 올린 것이다. 상수리나무의 열매가 잔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주변에 상수리나무가 없는데 싹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다람쥐가 주워다 묻어 놓고 잊어버린 것인 듯하다. 정상적인 다람쥐라면 많은 수의 도토리를 묻어놓고, 제대로 못 찾아 먹으니, 멧돼지가 냄새를 맡았다면 헤집어 찾아 먹었을 텐데 결국 숲의 정령이 도토리 씨앗을 지켜준 듯하다.

도토리 육형제 중 임금님에게 진상할 정도로 맛난 상수리나무는 짙은 갈색의 뿌리를 내렸다. 도토리에서 나온 싹의 뽀얀 속살은 커서도 뽀얀 색을 유지할 터 다시 가랑잎을 덮어주었다. 호기심 많은 덜떨어진 녀석에게 발각돼 뽑히기라도 할까 철렁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길어다 부어 주었다.

참나무과에는 육형제가 있다. 폼나는 코르크 외투를 두르는 굴참나무, 한때는 굴피집을 짓는 데 사용하느라 수난 시대를 겪었다. 그뿐이랴 지붕을 덮는 재료로 쓰였다. 유독 백성을 사랑했던 충숙왕이었지만, 백성은 부역을 하게 되었으니, 골참나무라 불리기도 했다나. 짚신 밑에 깔았다고 전해지는 넓은 잎의 신갈나무, 떡을 싸서 상하는 것을 방지했다는 떡갈나무, 열매가 앙증맞은 졸참나무, 죽어서 꽃을 피워내는 갈참나무, 그리고 오늘 식겁했던 상수리나무. 육 형제의 열매는 모두 도토리라 불린다. `아콘'이라는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몸에 좋다고 한다. 중금속을 배출하는 성분이라 해서 인간은 묵을 쒀 먹는다. 한국의 멧돼지뿐이겠는가? 이베리아반도의 돼지, 이베리코는 주식으로 즐겨 먹는다. 줄기의 껍질에는 `타닌' 성분이 있다. 섬유의 내구성, 즉 견뢰도를 높이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성분이다. 고대부터 어망을 질기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봄에서 여름에는 수액을 내니, 사슴벌레, 풍뎅이, 나방류며 개미며, 나비며 벌이며 안 모이는 벌레가 없었다. 속살은 어느 나무에 비견해 떨어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 뽀얀 속살이지만 강하기에서 뒤지지 않는다. 하여 어지간한 기술을 사용해서는 쉽게 구부러트릴 수 없다. 그러나 성품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니, 건축자재로서뿐만 아니라, 음료를 숙성시키는 통으로도 활용되었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십자가 만큼은 떡갈나무로 만들게 했으니, 일상에서의 웬만한 소품과 가구, 건축, 선박 어디 한 곳 안 쓰이는 곳이 없다. 심지어 불에 들어가 숯으로 만들어져서는 냄새와 열을 통해 독특하고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 낸다. 트러플을 키워내는 떡갈나무, 표고버섯의 종균을 먹거리로 피워내는 갈참나무. 나무의 품격의 절정이다.

쇠를 녹일 수 있는 열을 내는 참나무 형제의 근성은 더디지만 멈춤이 없다. 그리고 마디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늘 그렇듯, 처음부터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건축자재는 소나무를 쓰지만, 못은 참나무를 사용했다. 강하기로 어느 나무가 범접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혼자만의 존재로 독립적이지 않다. 잎을 다 떨군 갈참나무는 겨우살이의 잎을 본인의 잎처럼 달고 있다. 더디지만 모든 것에 두루 나누어 주고 아낌없이 나누는 진짜 나무, 찐 나무. 참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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