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고 무디다 - 석류나무
더디고 무디다 - 석류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4.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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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비는 강수 시간이 짧아 `한때 내리고 그치는 비'가 되겠다”. “다만,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요란히 내리겠다”

갓 피운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향으로 온갖 날것을 유혹해야 할 꽃은 요란스러운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갑자기 땅으로 내동댕이친다. 그렇게 모인 꽃잎은 여럿이 모여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언제 그랬던가 꽃잎을 피웠던 나무 밑동으로 모였다.

이제 막 꽃잎을 열고 벌들을 맞이하려 하는데, 때아닌 돌풍이다. 쉴새 없이 낭창거리는 가지에 매달린 꽃은, 걷잡을 수 없는 비명이다. 이제 막 꽃잎이 만발한 나무는 예기치 못한 일기에 존재의 위협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혹한의 한겨울을 이기고, 긴 봄 가뭄을 버텨 피워낸 꽃은 아! 아직 때가 아닌가 싶을 듯하다.

성급하게 잎을 틔운 것은 아닌 듯한데, 냉해에 잎들이 생기를 잃었다. 꽃잎도 매한가지, 말라 타들어 간 듯 형태가 볼썽사납게 변하고, 본래의 색은 온데간데없다.

유난스레 정신 사납던 까치도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쥐죽은 듯 몸을 숨겼다.

꽃을 피우지 않은 나무, 싹을 틔우지 않은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다른 나무는 꽃망울을 달고 꽃을 피우고, 벌들을 불러들이는데, 이 녀석은 도무지 반응하지 않았다. 벌써 꽃을 피우고 지고, 잎을 한참이나 올렸는데도 도통 봄을 반기지 않는 듯하다.

바싹 메마른 가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왔다갔다. 혹여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가지를 살짝 잘라본다.

“나 잘 살아 있거든, 한낮이 무척 덥다고?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야!” “돌풍이 분다고? 쌀쌀하다고?” “꽃을 피우지도 않았고, 싹도 틔우지 않았으니 걱정할 일이 없지”

남부 수종인 금목서도 묵은 잎을 떨구고 새잎을 올리는데 죽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쉬 물을 올리지 않고 싹이 나올 기미가 육안으로는 분간이 어렵다. 그러다 보니 늘 자신의 존재를 쉬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꽃을 떨구고, 잎을 한참 틔우고 윤기를 올리는 시기에 아주 천연덕스럽게 싹을 올리리, 참으로 묘한 녀석이다. 매번 많은 새순을 올리고 많은 가지를 달지만, 가끔 가시처럼 날카롭게 변한 가지를 곧추세우지만, 기본 줄기는 늘 그대로 한결같은 멋진 녀석이다. 쉽사리 굵어지지 않는 녀석이다. 그러니 속이 얼마나 단단할 것인가?

자신에게 닥칠 위협을 알았던 듯, 애써 서둘러 싹을 틔우지 않았다. 늘 그렇듯 꽃 잔치가 끝나갈 무렵 불그스레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속으로 안았던 열정을 붉은 알알이 속으로 하나 둘 채웠다.

늦을지언정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은 열정을 안으로 피운다. 오랜 시간 꽃을 피운다. 한여름 연이은 무더위보다 더 뜨거운 꽃을 안으로 키운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가지는 땅으로 숙이고, 꺾이지 않을 가지를 잡는 줄기는 더욱 희게 변한다.

연륜이 더해가며 땟물을 벗고 뽀얀 색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붉은색이 강해지며 더 말쑥하게 단단하게 변해가는 고목, 석류나무다.

“전국 요란한 황사비… 그친 뒤 미세먼지 `나쁨'”. 그러든 말든 그저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깐. 언제나 싹을 틔울까 보채고, 지청구를 들을지언정, 서둘 일 없다.

짧을 수도 있겠지만 꽃은 피울 것이고 열매는 품이 넓어지고 색을 더욱 진하게 보석으로 키워낼 것이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 그 속은 달 것이다. 무디다고 더디다고 하겠지만, 더 넓은 세상을 품는다. 그토록 뜨거운 여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하늬바람이 불어서야 닫았던 두꺼운 가슴을 세상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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