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정환범
애국지사 정환범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3.04.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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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일본 제국주의의 엄혹한 단속에도 그들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3·1 운동이 있은지 104년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은 일제의 악랄한 만행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일이다.

당시 영국태생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수의사이며 학자이고 수의학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박사의 부탁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이가 있다. 무고한 청년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보도한 애국지사 정환범이다.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로 갔다가 3·1 운동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의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스코필드 박사가 학살장면을 찍은 사진 50매를 갖고 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일제의 잔인한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게 했다.

그해 11월 임시정부 충남 공주군 조사원에 임명된 그는 공주군 내 각종 자료를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중 의열단원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을 했다. 1921년 2월 미국에서 이승만의 비서 임병직이 프랑스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가 구미 여러 나라의 지원을 호소할 때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그다음 해 런던대학에서 상업경제를 전공한 그는 1935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박사과정을 밟아 박사학위를 받고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한국독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광복 1년 전 상해에서 임시정부 외무차장에 임명되어 1945년 8월15일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만주 중국과 유럽 각국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그가 중국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무역과 경제계의 장래', `시장연구' 등을 써서 영문으로 된 책을 영국에서 발간하여 당시 과학계에 크게 화제를 끌기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했음에도 유창한 우리말로 한 말이 있다. “나는 외국에만 있어서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조선을 잊어본 일은 없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정치 경제에 대한 것을 학교에서 강의한 일이 있고, 임시정부와는 직접 관계는 없었어도 요인들과는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일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조선의 경제재건을 위하여 미력을 바쳐 건국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1946년 7월 신한공사 총재를 지낸 그는 재일교포 재산반입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1년 후 대한육상경기연맹회장과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다. 1948년 11월 중화민국과의 통상교섭과 중국 내 재산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주중화민국특사로 임명되어 난징에 주재하면서 제반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49년 1월 주일본 대표부 공사에 부임하여 재일한국인에 대한 한국대표부의 직접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 오사카, 나고야, 고베, 후쿠오카에 사무소설치를 시작했다.

1950년 1월 공사직을 사임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갖고 있던 재산 6000만~7000만원 모두를 한국의 육영사업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광복된 지 마흔다섯 해가 지난 1990년 정부가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국립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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