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봄비
  •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 승인 2023.0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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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작가 한강의 『서시』의 한 부분이다.

이 시구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나는 내 운명을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질곡이 없는 삶이었다. 산길처럼 위태롭지도 않았고, 오솔길처럼 아기자기하지도 않았던 듯싶다. 그렇다고 동네 뒷골목처럼 옹색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우마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평범하고 밋밋한 길을 어려움 없이 살아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삶의 역정(歷程)이란 게 어느 한 부분을 뚝 떼어내서 `여기까지요'라고 단정 짓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길이 길에 연하여 한없이 이어지듯 오늘의 삶 또한 내일로 이어져 어딘가를 터벅터벅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운명에게 “그동안 고마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라고 말하며 두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그런데 요즘 내 생활에 다소 회의를 느끼고 있다. 때론 삶에 활력을 잃고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때론 자존감이 떨어지며 사는 게 공허해지기도 한다. 말수도 줄고 크게 웃는 일도 적어졌다.

은퇴자들이 나이 들어 살아가는데 가장 힘겨운 것 중의 하나가 목표와 희망이 없는 거라고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생각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게 애매하고, 무언가를 희망하기에는 부질없는 욕심으로 비치기도 한다.

새벽녘,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로 산책을 나갔다. 얼굴에 무언가 부드럽고 시원한 게 와닿는다. 비라고 하기도 그렇고 이슬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바싹 마른 나뭇잎에 물기가 젖어 드는 상쾌한 아침이다. 우산을 쓰기도 불편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어둠이 걷히며 봄의 정취가 성큼 다가선다. 몽실몽실 흩날리는 는개는 메마른 잔디 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물이 올라 푸른 빛이 감도는 나뭇가지는 한층 여리게 사분거린다. 한참을 걷고 나니 어느덧 앞섶에 물기가 촉촉하다.

문득 일강춘우벽사사(一江春雨碧絲絲)라는 한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고려말 시인 진화의 『야보』라는 시의 한 구절로`한가로운 흥취에 젖어서 들녘을 걷다가 강가에 이르러서야 푸른 봄비가 내리는 줄 알았다'라는 내용이다. 봄비가 얼마나 여리고 정겨웠으면 강물에 어린 푸른빛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비가 오는 줄 알았을까?

나이 들어 자연을 벗 삼아 지향(志向) 없이 살아가는 선비의 풍류를 읊은 것이라고 한다. 어느 선배의 말이다. 젊었을 때는 이 시를 읽으며 여유 있고 멋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이가 들어 다시 감상하니 풍류라기보다는 마음에 위로가 된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여유로운 삶이란 것이 바쁜 틈틈이 하던 삶의 수단이었으나, 나이가 드니 일상 행하는 삶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늘 시간과 일에 쫓기듯 살다가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으니 위로가 된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을 열심히 일하고 통장의 잔액을 늘리는 것을 목표와 희망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주어진 시간은 선물일까, 고통일까? 노동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고통이요, 삶 자체가 인생의 목표인 사람에는 선물일 것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일하는가, 일하기 위해 사는가? 인간은 언제부터 일하고 창고에 재물을 쌓아 놓는 것을 삶의 목표이자 행복으로 삼았을까. 삶 자체가 일이요, 인간이 직업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에 가슴 설레고, 알 듯 모를듯한 한 줄의 시구에 삶을 되작이고,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에 추억을 떠올리며 봄을 맞이해 보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봄 길을 걸어 보자. 그러다 우연히 만난 누군가 내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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