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순간들
2월의 순간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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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2월은 애매하다. 다른 달보다 이틀 또는 사흘이 짧고 새해가 시작되는 1월에 비해 다짐과 의지도 옅어지므로 치열하기가 만만치 않다.

새 학기가 3월에 시작되는 학제 탓에 2월은 특히 가만한 계절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내고 있는 2월은 다른 달에 비해 의미를 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나 2월만큼 박동의 시간이 없으니, 2월이므로 비로소 더 이상 게으를 수 없고, 2월이니까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2월이 두근거리는 계절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시냇물이다. 넓든 좁든 세상의 모든 시냇물은 2월이 되면서 마침내 몸을 뒤척이며 흐른다. 한 겨울 얼음에 갇혀 정지된 상태에 머물던 시냇물은 2월에 이르러 날이 풀리면서 고체의 몸을 풀고 흐름을 시작한다. 얼음을 뚫고 틈새를 찾아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2월은 닫혀있던 세상의 문을 여는 신호탄과 같다. 물소리가 세월의 흐름을 깨닫게 하는 것은 자세히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만 가르쳐 주는 깨달음이다.

시냇물은 봄에 가장 청아하고 기운차게 소리를 낸다. 한여름 폭우에 휩쓸려 굉음을 내는 물소리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물속에도 나뭇잎이 쌓여 흐르는 물을 자꾸만 붙잡는 별리의 계절이 되면, 물은 한 해 동안의 고단함을 추스르듯 소리 죽여 흐르다가 이내 얼음에 갇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시냇물이 언 몸을 녹이며 본격적으로 박동하는 2월은 그러므로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가에서 2월을 생각한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사형선고가 이루어진 인중근의사의 숙연한 2월과 막대과자를 통해 사랑을 고백하는 발렌타인데이 상술의 풍습을 비교하면서 굳이 길항할 일은 아니다. 숨죽이며, 온갖 불평등에 시름하며 살아왔던 여성들이 할 말을 하고 살 수 있다는 용기의 부드러운 박동으로 여길 수 있음도 짧고 애매한 2월이므로 허락될 수 있다.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존재를 드러내 밝힌다.」고 노래하는 오세영 시인의 <2월>을 읊조리며 2월의 순간들을 생각한다.

104년 전, 1919년 2월 8일 왜구의 심장 동경(東京)에서 조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유학생들의 뜨거운 피는 짧은 2월이므로 더 높은 온도로 끓어올랐을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정의와 자유의 승리'와 `민족자결', 그리고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다짐한 청년 유학생들의 선각은 2월의 가장 숭고한 순간들이다.

그 해 2월. 일본의 침략에 식민의 땅에서 식민의 몸으로 견뎌야 했던 조선의 백성들은 가장 치열하게 준비하는 2월의 순간들을 살아왔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기미 독립선언은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심혈이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주창한 선언이 3월1일 푸른 조국의 하늘에 울려 퍼지기까지 사람들은 얼마나 은밀해야 했으며, 얼마나 진심이었고, 또 얼마나 인류애를 키우기 위해 모든 사상과 이념, 그리고 모든 혼신을 기울였을까.

새학기를 준비하고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짧고 애매한 2월을 탄식만하는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간절함을 기억하지 못한다. 섣부른 관계 정상화를 위한 거친 말과 어설픈 행동이 지금 2월의 하늘을 어지럽히는 사이, 눈 녹은 물의 절실한 흐름을 타고 복수초 노란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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