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도가니’가 보이는 이유
‘망각의 도가니’가 보이는 이유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10.0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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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영화 ‘도가니’의 후폭풍이 대단하다. 경찰은 영화의 배경이 된 인화학원 장애인 성폭행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들어갔고, 교육 당국은 인화학교 폐교를 포함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치권에서는 ‘도가니 방지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법 개정안이 추진될 모양이다. 그러나 영화가 몰고온 여론의 격랑을 피해갈 요량들만 엿보일 뿐 자기반성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주도적으로 추진 중인 사회복지법만 해도 그렇다. 이 법안은 지난 2007년 빛을 봤어야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복지재단 이사진의 3분의 1을 외부의 공익이사로 선임토록 하는 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보건복지부도 공익이사 비율을 4분의 1로 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장애인 폭행치사와 성추행, 보조금 횡령 등으로 얼룩진 ‘성람재단’의 추악한 비리가 드러나 해당 시설 장애인들과 단체들이 천막농성을 펼치던 시점이었다. 영화 ‘도가니’의 배경인 인화학교 사건이 폭로돼 떠들썩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의 복지재단을 운영하는 종교계가 반대하고 나서면서 법안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공익이사 규정 등 핵심 내용을 삭제한 개정안을 따로 만들었고, 여야가 맞서다가 본회의에 상정도 하지 못 한 채 폐기된 것이다. 장애인단체들이 최근 한나라당에 법안 추진에 앞서 사과부터 하라고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가해자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사법부의 반응도 국민의 법 감정과는 멀어 보인다. 인화학교 가해자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은 재판 도중 합의가 이뤄져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1심 판결 전 고소가 취하됐다면 공소기각이 됐겠지만, 당시는 항소심 재판 중이라 고소의 효력이 유지되던 시점이었다. 재판부의 소신 판결이 가능했었다는 얘기다. 당시 재판관은 “2심 재판 중 고소 취소된 다른 성폭행 사건들을 검토했지만 실형이 선고된 경우가 없어 다른 사건과의 형평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전례가 없어 관행을 따랐다는 설명이다. 법리(法理)로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장과 교직원들이 한통속이 돼 항거 불능의 장애 제자들을 상습적으로 유린한 악질적 범죄에 다른 범죄와의 차별이 아닌, 형평의 논리를 들이댄 것은 일반인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관행적 판결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최소한 양형의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한다.

해당 교육청과 교과부 역시 인화학원 비리를 폭로한 교사는 파면되고 가해 교사는 복직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방기한 점 하나만으로도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 ‘도가니’의 작가 공지영은 집필 도중 인화학원 측으로부터 협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신변의 불안을 무릅쓴 여성 작가의 고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요즘 각계의 뒷북과 호들갑에 동참하느라 바빠진 언론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들의 기만성은 현재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장애인고용촉진법에는 장애인 의무고용 규정이 있다. 공공기관은 정원의 3%, 민간기업은 2.3% 이상을 장애인들로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기관들의 실천이 유달리 저조하다. 공공기관 중에는 국회가 꼴찌다. 검찰과 법원도 하위권이다. 시·도 교육청 가운데 법이 정한 대로 장애인을 고용한 교육청은 한 곳도 없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가르치는 기관들이 한결같이 위법을 무릅쓰면서까지 장애인을 홀대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민간기업이 법을 지킬 리 없다. 대다수 재벌과 농협 등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 연간 수십억원의 부담금을 물고 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규정한 법을 돈으로 사 버리는 세태를 공공기관이 앞장서 조장한 셈이다.

입법·사법·행정을 망라한 공적 시스템이 포기한 장애인들을 ‘인화학원’ 같은 일개 복지법인이 존중할 리 없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는 통렬한 자기반성 없는 공허한 외침들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의 도가니’가 ‘망각의 도가니’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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