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
5·18 광주 민주화운동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4.05.2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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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1980년 5월18일 아침. 집을 나와 십여분 걸어 도착한 충청일보사의 차가운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편집국에는 군인이 신문에 들어갈 기사를 읽고 있었고, 내가 일하는 제작국은 모두들 겁먹은 얼굴로 자신의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이틀 사흘이 지나자 누군가 광주에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났는데 절대 알려고 하지 말아야지, 자칫 소리없이 어디론가 붙들려가 큰 곤혹을 치를지 모르니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군인의 신문 제작 검열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혹함으로 정치에 관련된 기사는 물론 모든 사건기사와 하다못해 교통사고소식도 신문에 실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문이 인쇄되고 있는 윤전기를 멈추게 하고 납으로 된 신문인쇄판을 깎아내 검게 처리된 충청일보가 독자들에게 보내지기도 했다.
사십여년이 흘러간 이제서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알려진 그날들의 실제 이야기가 세상에 폭로되고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도 의문의 실마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광주의 거리와 골목을 얼룩무늬 공수부대 장병들이 최루탄은 말할 것도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짓밟으면서 단검으로 찌르고, 총대로 후려치는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터였던 실상이 하루 빨리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반도 서남단의 도시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를 하는 것에 용감하게 저항한 사건은 6.25 전쟁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5월27일까지 10일동안 몸을 사리지 않는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한 것은 물론이고 믿기 힘든 고문을 당하고 붙잡혀 갇힌 일이 강산이 네번이나 변한 오늘날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아무런 죄가 없는 광주시민들을 죽이고 들어선 전두환정권은 사회불만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들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피살당한 권력의 틈새를 전두환과 노태우에 의한 일부 군장성들이 함께 정권을 잡기 위해 저지른 12·12 군사반란과 광주사건은 박정희군부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린 전두환의 정권 찬탈행위에 당당히 맞선 광주 민주화운동에의 무자비한 국가폭?사태의 사실은 아직도 시각에 따른 다른 해석과 더불어 의문을 풀어야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반독재저항운동인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이승만부정부패에 맞서 일어난 4·19 학생의거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2017년 촛불항쟁과 더불어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1997년 대법원은 초법적인 군부집단에 맞선 광주시민의 무장저항해위는 불법적인 폭동이 아니라 국민의 저항권에 기초한 불복종행위이자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하여 부당한 국가폭력애 맞서는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이 헌법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정부도 5·18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5월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으며, 국가차원의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교과서에도 이 내용을 적었다.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했고, 시민항쟁의 현장을 사적지로 보존했으며, 5·18 민주화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또한 5·18 정신을 반영한 헌법전문개정안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학살의 실질적인 책임자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7년 사법부의 판결을 전적으로 무시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궤변으로 희생자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비상계엄 확대 후 공수부대 파견이유와 진두지휘자,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정확한 사망자 숫자, 핵심사실도 아직까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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