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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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4.05.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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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아마도 술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 종류는 다르지만 술은 모두 존재한다. 제례나 혼례 같은 주요 의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도 술이고 희로애락 삶의 모든 과정에 동반하는 것도 술이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은 그의 시를 논할 때 술을 빼놓고는 말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멍 때리기(自遣)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 술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날 저무는 줄 몰랐더니
落花盈我衣(낙화영아의) 떨어진 꽃잎이 내 옷에 가득하더라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 술에 취해 자리에서 일어나 개울 따라 걷노라니 하늘에는 달이 떠 있는데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 새는 둥지로 돌아가고 사람 또한 보이지 않네

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인은 술 마시기에 참으로 진심이다. 음주는 중국 시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데, 이는 실제적이기보다는 다분히 관념적이다. 시에 보이는 시인의 음주도 실제 모습이 아니라 시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장면이다.

그러면 시인은 이러한 음주 장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脫俗)의 추구이거나,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는 방편일 수 있다. 시인은 오로지 술 마시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날 저무는 것도 모르고, 꽃이 자신의 옷에 가득 떨어지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서야 시인은 앉은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시인이 술에 취한 것은 시인이 탈속의 상태에 들었거나,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보이는 것은 순수한 자연의 세계뿐이다.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과 하늘에 뜬 달 그리고 날 저물어 둥지로 돌아간 새, 이 모두가 탈속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시름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시름을 잊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일이 바로 술 마시기이다. 현실적으로는 유흥과 방탕, 일탈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음주이지만, 관념적으로는 탈속이나 무념무상의 경지에 닿아 있는 것이 음주이기도 하다. 떠들썩하고 사치로운 술자리는 또 다른 시름의 시작일 뿐이다.

홀로 안아 조촐하게 즐기는 술자리는 세속에 찌든 사람들 마음의 때를 닦아 주는 세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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