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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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09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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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백성됨이 가련코 불쌍하다
윤 승 범 시인



법은 만인 앞에서 평등하단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가슴에 팍팍 와 닿는다. 실감난다. 이제 다 그렇게 하자. 폭력사건이 터지면 두어 달 뒤에 수사를 하도록 하자. 압수 수색을 하는 것도 미리 다 알려주고 하자. 무조건 모른다고 하면 구속 안 되는 것으로 하자. 피해자가 있고 피해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했다고 하면 안 한 것으로 하자. 그리고 없었던 일로 하자. 법은 만인 앞에서 평등하다니까 재벌이나 권력자나 힘없는 서민이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그렇게 하자. 그래서 다들 법 없이도 살 수 있게 하자.

몇 년 전 어린아이들이 수련대회를 갔다가 화재를 당해 피해자 부모가 훈장을 반납하고 이민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분이 이 땅을 떠나며 했던 말씀이 "아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하며 떠났다. 그 분이 이 땅을 떠난 이유가 와 닿는다.

이 땅의 아이들은 비단 나이가 어린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힘없고 빽 없고 권력 없는 이들을 일컬음이다. 그들은 이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보호받을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의가 서지 않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갖가지 명목으로 이 땅의 백성 노릇을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의무와 채무뿐이다.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산하에 묻혀도 그 흔적이 없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탈출을 해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정부 기관은 없다. 그들은 백성을 보호하는 단체가 아니라 단지 군림하기 위한, 그리고 존재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국민연금도 결국은 세금으로 전락했다. 젊어서 많이 내고 늙어서 조금 가져가라는 억지 세금일 뿐이다. 그래도 그 명목은 국민의 안정적 노후를 위해서란다. 말도 못하게 높은 물가와 사교육체계를 갖춰 놓고도 출산을 하란다. 보조금으로 50만원 줄테니 많이 낳으라고 한다. 그래서 낳은 아기는 곳곳에서 유괴를 당하고 성추행을 당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는데도 불구하고 낳으란다. 과연 이 땅이 아기들이 평화롭기 살기에 적합한 땅인지를 묻는다.

나라를 위한다는 정치가들은 선거 때가 되니 이합집산에 분주하다. 민생은 이미 없다. 치졸한 이기심과 명예욕과 권력욕만 있을 뿐이다. 백년지대계의 나라야 어찌 됐건, 당대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심보니 그 뒷감당은 누구도 못한다.

그래 그만하자. 이 따위 글로써 무엇을 일굴 수 있으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 할 수 있으랴

- 중략 -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정현종 시인의 '시, 부질없는 시' 중에서-



그래, 우리 힘없는 백성이 기댈 곳은 이미 없다. 그저 저 혼자 고요하고 저 혼자 맑기 위해 아무도 건드리지 말기만 바랄 뿐이다. 설혹, 건드린다 한들 눈처럼 스러질 하찮은 목숨들이니 이 땅의 백성됨이 가련코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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