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이다.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은 이내 함박눈을 흩뿌리고 있다.
소리 없이 내린 눈을 가만가만 만져본다. 차가운 부드러움이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첫눈이 아님에도 눈 내리는 날이면 탄성이 절로 나오고 달 뜬 마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괜스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벨이 울리기를 바라며 퇴근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야속하다. 여전히 먹통인 휴대폰, 누구 하나 감동적인 메시지는 물로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니 심통이 난다.
마음속에 인연들 몇 군데 문자를 보냈다. 그 또한 허공에 메아리칠 뿐 답이 없다.
첫눈 오는 날 조선시대도 임금께 장난을 치는 것이 예외적으로 가능했다는데 나이 먹어 그런가 자꾸만 허전하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상왕 태종이 노상 왕인 정종에게 첫눈을 상자에 담아 약 상자라 속이는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절대군주 임금에게 거짓을 한다는 것은 대죄를 받아 마땅한 일, 허나 오로지 첫눈이 내리는 날만큼은 용서되었다.
엄격한 규율을 깨고 그날만이라도 웃으며 지금의 만우절처럼 선의에 거짓이 아름답게 비추는 날이 된 것이다.
어쩜 나이와 상관없이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포근하고 마음에 평정을 찾으니 첫눈 오는 날만큼은 널리 성행하지 않았을까.
오늘따라 집까지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첫눈 내리면 만나자고 새끼손가락을 걸던 그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첫눈이 내리는 날까지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 했는데 첫사랑이 이뤄졌을까. 그땐 첫사랑도 없으면서도 손톱이 자라도 깎지 않고 첫눈 내리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면서도 손톱 끝에 남아있는 봉숭아물을 깎지도 못하고 동동거렸던 수수했던 그때, 오늘따라 몽환적인 사랑에 머문다. 여전히 품속에 자는 핸드폰을 슬그머니 밀어놓고 오랜만에 메신저 선물박스를 클릭해 본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슴에 먹먹한 울림이 인다. 한적한 시골마을, 프란체스카 중년의 부인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찍기 위해 방문한 로버트 사진작가의 운명적 만남, 단 4일간의 아릿한 사랑이다. 여자로서의 행복보단 엄마, 아내로서의 생활에 회의감 느낄 때 묘한 타이밍이다.
`흰 나방이 날갯짓할 때 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오늘 밤 일이 끝난 후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라는 프란체스카 메모로부터 그들의 사랑이 움튼다.
나흘 동안의 꿈같은 사랑을 하고 평생 가슴에 묻고 그리워한 프란체스카, 불륜이라고 세상에 비난을 받고 들끓게 했던 영화, 외도를 두둔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운명 같은 사랑은 눈처럼 소리 없이 비처럼 촉촉하게 스며든다. 가슴에 방망이질하게 하고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애잔한 사랑의 미묘함, 누구나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 한 가지는 있지 않을까.
아니 비밀의 방 한구석에 아직도 식지 않고 연모하고 있는 사랑이 있지 않을까.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순 있다. 그러나 숭고하고 어려운 사랑을 지키는 건 목숨보다 어렵다 했다. 그래서 사랑은 영혼이다.
적막이 흐르는 사위, 인기척조차도 방해될 것 같은 이 시간 오롯이 빗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흩날리던 눈이 그친 자리엔 아픈 사랑의 흔적처럼 얼룩만 남긴 채 지붕 위에만 하얗게 덧칠해 놓았다.
입김이 서리는 창문, 희미한 가로등불빛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유유히 얼 비추는 특별한 하룻밤이 깊어간다. 들숨과 날숨처럼.
生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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