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단장에 바쁜 것대산 봉수대
새단장에 바쁜 것대산 봉수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7.24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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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체험 문화답사기
한 윤 경 <역사논술 지도교사>

"엄마, 어디세요."

부모님이나 친구가 어디에 있든 핸드폰만 켜 놓는다면 언제든 소재 확인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요. 몇년 전만해도 감히 상상을 못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길을 걸으면서도 통화를 할수 있어 약속장소가 어긋났다고 해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은 없어요.

그럼 핸드폰이 없던 옛날에는 급한 소식들을 어떻게 전했을까요.

사람이 직접 전하거나 말을 타고 가서 소식을 전하는 파발제와 함께 신식우편, 전기통신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일반적인 통신방법이 봉수였어요. 봉수란 봉(횃불)과 수(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적인 통신제도를 뜻한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했지요.

이 제도는 역마나 인편보다는 시간적으로 단축됐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해 지방의 급변한 상황이나 국경 지방의 적의 동태를 중앙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어요. 평상시에는 1개의 횃불로 하구요, 적이 나타나면 2개의 횃불, 적이 국경선에 접근하면 3개의 횃불, 적이 국경선을 침범하면 4개의 횃불,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5개의 횃불을 올렸지요.

청주에도 봉수를 올렸던 장소가 있어요. 상당산성 남쪽에 있는 해발 484m의 것대산이 그곳이랍니다. 거질대산이라고도 불렸는데요, 이곳에서 경남 남해를 출발해 충북 영동, 옥천을 거친 봉수를 청원 문의 소이산에서 신호를 받아 진천 소을산, 충주 등을 거쳐 서울 남산까지 전했어요.

봉화는 다른 말로 낭화 또는 낭연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리의 똥을 땔나무와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에요. 이리 똥을 사용하면 바람이 불어도 연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똑바로 올라간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죠.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리 똥을 구하기가 어려워 대신 쇠똥이나 말똥을 구해서 썼다고해요.

봉수를 담당하던 사람은 봉군으로 본디 양인에게 할당된 군역의 하나였지요. 그러나 봉수가 국가 안보에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춰 산꼭대기를 오르내리고 하는 고역으로 차츰 위기를 맞게 되죠. 결국 선조때 삼포왜란 등 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에도 봉수가 오르지 않아 쓸모가 없어졌지요. 그 후로 파발제가 등장하면서 조선후기 완전히 폐지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됩니다.

물론 청주 것대산 봉수대도 북쪽과 동쪽면에 석축의 일부분만 남긴 채 모두 사라지게 됐지요. 그래서 애써 산 정상에 올라도 봉수대 표지판만 덩그러니 있어 아쉬움이 컸었지요. 그나마 지난 2004년 높이 2m, 둘레 3m 크기의 봉수대가 1기라도 복원돼 미흡하긴 하지만 '아, 이곳이 봉수대였구나'하는 생각을 들게 해 무척 반가웠어요.

그런데 시에서 연말까지 유실된 봉수대를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는군요. 것대산 봉수대 정비를 마치면 상당산성 옛길도 복원해 시민들의 여가문화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라니 우리것을 아끼고 지키는 것에 앞장서주는 시에 고마울 따름이죠. 여름방학을 맞아 더위에 지쳐 약해지기 쉬운 체력 보강 겸 것대산에 올라보는 것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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