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에서 깬다. 하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젊은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다 깨다 한다. 어금니를 꽉 깨문 듯 꼭 다문 입술은 도전적이고, 짙은 눈썹에 정면을 응시하는 강한 눈빛이다.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사내의 다부진 체격에 떡 벌어진 어깨는 강렬한 존재감이 전해진다. 커다란 귀는 지도력이 있으며 차분한 성격에 생각이 깊고 재물복이 있으며 통찰력을 가진 상이란다. 그의 귀를 보면 커다랗고 넓은 귀는 모든 것을 갖춘 상이랴. 예사롭지 않은 관상의 사내는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다.
흰색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간송 선생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서울 보화각 가는 길이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의 옛 이름이다. 보화각에서 비롯된 문화 보국의 첫걸음, 간송 선생은 거상 집안 출신이지만 삶의 의미가 남달랐다. 간송 선생은 ‘문화재는 민족의 자존심이오, 억만금을 치러도 아깝지 않소!’라 외치며 문화재를 수집한다. 심금을 울리는 이 한 줄은 간송의 삶이요 철학이랴. 문화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이들에게 웃돈까지 주며 구입하여 보존한다. 반출 위기에 있는 문화재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반출되지 않도록 수집해 후인에게 문화유산을 전승한다.
한때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사건이 있다. 사라진 불교 문화재가 개인 수장고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어 방송매체마다 머리글을 장식한다. 도난당하였던 문화재를 음지에서 은밀하게 거래한 사립 박물관장은 개인 수장고에 은닉한다. 도난당한 일부 작품이 미술 경매품 전시장에 나오면서 박물관장은 덜미가 잡혀 검거된다. 국가유산청에 의하면 문화재 중 일부는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개인 수장고에서 어둠 속에 갇혀있던 불화, 지석(誌石) 등 수많은 문화재가 빛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후인에게 문화유산을 물려주려 동분서주하고, 누군가는 사리사욕으로 어둠 속에 문화재를 숨기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현실이 먹먹하다.
서울에 다다르자, 조선의 여인을 그린 혜원 신윤복의 화첩이 머릿속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마음이 달뜬다. 울창한 숲이 펼쳐진 도심 속 하얗게 색칠된 이 층 건물 미술관이 시선을 압도한다. 형형색색 화려한 장식도 꾸밈도 없는 순백색이다. 예로부터 흰옷을 즐겨 입은 우리나라 ‘백의민족’이라 한다. 고난과 역경 그리고 숭고함과 성스러움까지 흰색의 의미다. 아마도 보화각의 흰색은 순수함과 강인한 마음가짐인 백의민족의 흰색을 상징했으리라.
미인도를 만날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건만 미인도가 보화각에 없다. 대구 간송미술관의 특별 전시로 이관되어 전시 중이란다. 미인도를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눈을 감고 찬찬히 음미한다. 커다란 가체를 얹은머리, 긴 목선과 가냘픈 어깨선은 품에 안길 듯 여리여리하다. 가느다랗고 긴 눈매와 얇은 눈썹 발그레한 작은 입술은 과히 매력적이다. 옷고름을 푸는 듯 노리개를 만지는 듯한 도발적인 자세는 숨이 멎는다. 풍성한 옥색 치마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짧은 저고리는 매혹적이다. 보일 듯 말 듯 풍기는 은은하고 단아한 미소에 가슴이 녹아내린다. 이렇게 표정 하나하나에 느끼는 감성이 다르니 어찌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여인의 고혹적인 자태를 화폭으로 담았으니 가히 미인도는 뭇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 충분하리라. 화첩에 담긴 예술적 표현, 감성 등 문화재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와 기록 그리고 예술이 담긴 민족의 얼과 혼이랴.
햇살 한 조각이 차창에 떨어진다. 해가 뉘엿뉘엿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보화각도 점점 멀어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시공간에서 나를 회억한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가 자문한다. 그저 밋밋한 일상에서 시간 흐름에 떠밀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삶의 속도를 늦추고 돌아본다.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보다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리라. 마음속 진솔한 삶이 묻어 있는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문화가 우리를 잇는 고리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