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 케이푸드 등 한국의 대중가요와 드라마, 음식 등에 코리아의 ‘K’를 붙여 만든 키워드가 세계인들의 관심을 끈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2024년에 특별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대 사건이 있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아닐까 싶다.
12월 3일,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비상계엄은 선포 두 시간 만에 국회가 무효화시켰고, 네 시간 만에 국무회의에서 철회가 이루어졌다. 이어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면서 내란 연루 세력들은 일사천리로 정리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다.
비상계엄은 문제가 있더라도 내란은 아니다. 심지어는 사기 탄핵이라는 주장이 여당의 당론이 되고,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은 수사에 당당히 임하겠다고 큰소리치고도 출석 요구에 번번이 응하지 않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됐음에도 관저를 요새화하면서 맞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외신에 비친 대한민국은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한 나라가 되고 있다. 첫째는 ‘K-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친위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비상계엄 선포를 단 네 시간 만에 번복시키고 열흘 만에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회복탄력성도 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셋째, 초연결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총을 든 특수부대원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광경이 디지털 미디어로 생중계된 상황에서도 내란에 동조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45년 이후 마흔여섯 차례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중 열 번이 최근 10년 사이에 발생했고, 성공률은 약 80%에 이른다고 한다. 권력을 가진 측에서는 물리력 동원이 그만큼 쉽기에 성공률도 높은 것이다.
AP통신은 ‘12·3 비상계엄’을 ‘친위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비상계엄 선포가 단시간에 평정된 것에 대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까지 평가했다.
로이터통신은 “시민들이 시위에 들고나온 응원봉이 기존 시위 아이템인 촛불을 대체하면서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이 됐다”라며 “새로운 집회 문화가 차세대 민주주의를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기까지의 흐름은 순방향이다. 그런데 비상계엄은 문제가 있더라도 내란은 아니라는 수준을 넘어서 비상계엄 선포를 구국의 결단으로 여기는 세력들이 결집하는 현상은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고 있다.
위에 예로 든 새 가지 역동성의 원인은 우리도 궁금한 바지만 의외로 쉽게 설명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늘 충분한 담론이나 숙론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양분화돼 즉자적으로 반응했다는 얘기다. 과장하자면 ‘무조건 반사’ 수준이다.
일제 강점은 친일과 독립운동에서부터 해방 후 ‘친탁이냐 반탁이냐’로 갈라지게 했다. 6‧25 전쟁은 ‘반공이냐 통일이냐’로 편을 갈랐으며, 여기에서 친북, 종북 시비가 비롯됐다. 그러다가 지역감정이 동과 서로 양분했고, 이른바 ‘1찍’과 ‘2찍’만 존재하는 세상이 됐다.
극단적 양자구도는 마치 전시 동원 체제의 군영(軍營)과도 같아서 언제든 부름이 있으면 출격하는 태세를 갖춘 듯하다. 그러니 아(我)가 아니면 적(敵)으로 자동 분류하는 상황이다. 판단도, 행동도 빠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정치가 이런 양극화에 기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남북 대립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남한 내 동서 대립에 더 의존하는 듯하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하는 담론(談論)과 깊이 생각해 충분히 의논하는 숙론(熟論)의 결여가 대한민국을 고달프게 만들고 있다. 조리 있게 내 생각을 주장하되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면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화요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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